대한노인회 고문 이만섭 전 국회의장 “청와대도 잘못하면 비판합니다, 살아있을 때 바른 소리 해야지요”
대한노인회 고문 이만섭 전 국회의장 “청와대도 잘못하면 비판합니다, 살아있을 때 바른 소리 해야지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1.30 11:18
  • 호수 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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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8선 의원에 국회의장 2차례 역임… ‘날치기 국회’ 청산 앞장서
비서실장, 3인방… 국민이 바꿔 달라는데 왜 안 바꾸는가… “아버지 닮길 바래”

지난해 말 ‘정윤회 문건유출사건’이 터졌을 때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일갈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제대로 조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서실장과 비서 3인방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한다면 스스로 물러나 대통령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게 인간적인 의리이다.” 이 전 의장은 이어서 자신의 과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최측근이었던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민심의 뜻에 따라 경질한 적이 있다. 이후락은 권력형 부정부패로, 김형욱은 권력형 인권 탄압 등의 이유로 두 사람을 내보내야 한다고 목숨 걸고 투쟁했고 박 대통령은 이런 민심을 과감하게 수용했다. 지금 새누리당에서는 의원직을 걸고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쉽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다. 원로 정치인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할 이유다.
이만섭 전 의장은 올해 83세이다. 그러나 여전히 ‘팔팔하다’. 정치·경제·사회 등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고 진취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의 정치 열정과 건강 얘기를 듣고 싶어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처음엔 거절당했다.

-처음에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라도.
“전 아직 노인이 아니에요. ‘백세시대’는 노인 신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난 경로당에도 안 가봤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제 마음은 청년이에요.”

-대한노인회 고문이라면 노인회 행사에는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노인회에 마음이 없어서 나가지 않는 게 아니라 나가면 내가 진짜 노인 될까봐 안 나가요.(웃음)”

-신문·종편 등에서는 종종 뵙는다.
“여기저기서 얘기해달라고 하면 몸을 아끼지 않고 항상 나가요. 저는 여야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에요. 청와대도 잘못하면 야단치고 여야 가리지 않고 야단칩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 나라 위해 바른 소리하고 죽을 때도 웃으면서 당당하게 죽어야겠다, 그게 내 소신이에요.”

-최근 회고록 ‘정치는 가슴으로’(나남)도 펴냈다.
“3~4개월 코피 흘리며 작업했어요. 다른 사람처럼 대필도 아니고 내가 직접 쓰고 교정까지 보고 했으니까요.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하는 거라서 날짜, 고유명사, 인명 이거 정확히 나가야 하니까요.”

-무얼 얘기하고 싶었나.
“제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첫 출마할 때 침식을 같이 하며 유세를 다녔어요. 이 나라의 산업화를 이루고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데 박 대통령 모시고 열심히 일했다는 얘기를 썼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란 비판도 받는데.
“제가 3선개헌, 장기집권을 반대했어요. 그 때문에 제가 8년간 정치를 못했지만 서도요. 그분이 내 말을 듣고 3선개헌하지 말고 차라리 후계자에게 넘겼다가 4년 후 다시 받아서 하는 식으로 헌법을 고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어요.”

-당시 후계자로는 누가 좋았을까.
“제가 이효상 국회의장이나 백남억 당 의장 이름까지 댔어요. 이런 사람에게 4년을 맡겨라. 김종필은 (대통령이) 믿지 않고 마음에 내키지 않을 테니까 그 사람 빼고 이들에게 맡기고 헌법 고치지 말라고요. 요새 러시아의 푸틴이 내가 얘기하는 아이디어를 잘 활용하고 있어요. 대통령 임기 끝나자 직계 사람을 대통령에 올려놓고 자기는 총리하고 임기 끝나고 다시 대통령 하고….”

-요즘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를 닮아라, 이겁니다. 김기춘 실장이나 3인방, 아버지 대통령은 바꾸는데 왜 국민이 바꿔달라는데 안 바꾸느냐. 도의적으로 정윤회 문건 사건이 그만큼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정치적으로 혼란을 일으켰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대구 태생의 이만섭 전 의장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인터뷰한 계기로 박 대통령 선거유세에 합류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8선 의원으로 1993~1994년, 2000~2002년 두 차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국회가 ‘거수기’란 말을 들을 정도로 법안의 날치기 통과가 고질병처럼 굳어진 상태에서 날치기 없는 국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다했다. 모교인 연세대는 업적을 인정해 2009년 연희관에 ‘이만섭 홀’을 지어 헌정했다. 2011년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상.

-기자에서 어떻게 정치인이 될 생각을 했나.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인터뷰한 기자가 저였어요. 자주 만나다보니까 ‘아, 이 어른이 8년 이 나라를 맡아서 하면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그래서 장충동 최고회의의장 공관에 찾아가 ”내가 구정치인처럼 감투나 돈을 바라는 게 아니고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느냐 그 소신만 밝힐 기회를 달라고 얘기했어요. 그때 박 대통령이 무척 반가워하더라고요. 공화당 조직은 있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었어요. 김종필은 1차 외유하고 없었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간적인 에피소드는.
“그 분이 간혹 불러서 들어가면 서랍을 열어 ‘가만있어, 이거 써’ 하면서 ‘촌지 박정희’라고 쓴 노란봉투를 건네주었어요.”

-8선 의원이다. 정치 철학은.
“정의와 양심이에요. 모든 정치엔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이나 자기가 속한 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항상 생각해서 정치하라.”

-의원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정책이라면.
“남북가족면회소 설치(1964년)에 관한 견해 안을 제안했는데 당시 남북 통틀어 이산가족 상봉을 얘기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 때문에 김형욱이 반공법 위반으로 절 구속하려고 했지요.”

-갑자기 면회소 얘기가 나온 배경은.
“당시 도쿄올림픽이 열렸어요. 그때 이북에 신금단이란 육상선수가 400m 세계신기록을 세웠어요. 그 선수 아버지가 남한에 있었지요. 둘이 만나서 ‘금단아’ ‘아버지’ 그 말만 하고 헤어져야 했어요. 그걸 보고 친부모·형제들이 만나는 건 인도적인 문제인데 저럴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 다른 정책이라면.
“한미행정협정이에요. 패전국 일본과 미국 사이엔 그게 있었지만 우리는 없었어요. 굶주린 아이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 깡통이라도 주우려면 총으로 막 쐈어요. 그래도 하소연 할 데가 없는 겁니다. 안되겠다 싶어 한미행정협정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내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어요. 그걸 기초로 한 게 소파(SOFA)에요. 지금도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눈에 띄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원유철·홍지만·조해진·조원진 등이 장래성이 있다고 봐요.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바른 사람이에요. 김무성·김부겸·안희정·이인영·우상호·주호영·배정인·김영환도 괜찮다고 봐요. 여성 정치인 중에는 김을동 의원이요. 삼둥이 손자들 이름을 대한·민국·만세로 지었어요. 그 정신이 좋잖아요.”

-노인 자살이 심각하다.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최고라는 얘기 나오면 마음도 아프고 부끄럽기도 해요. 경제적으로 어렵기도 하지만 극도로 외로워서 그래요. 복지, 복지 하는데 가장 큰 복지는 자살을 막아주는 거예요. 기초생활보장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해당이 안 되잖아요.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이 무슨 소용 있나요. 그거 고쳐야 해요.”

-건강은 어떤가.
“좋은 척하고 있어요. 허리, 무릎이 안 좋아요. 밤낮 걷는 걸로 고치는 중이요. 늘 만보기를 차고 다니며 셉니다.”

-지난해 말 열린 대한노인회 금혼식 행사엔 참석할 줄 알았다.
“제가 1957년에 결혼을 해 올해 58주년이요. 2년 후면 회혼례를 할 사람이오. 50주년이라면 청년인데 거기 갈 이유가 없지요.”

-회혼례는 할 계획인지.
“그것도 생각 중이에요.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작년이 결혼 70주년이라고 해요. 제가 가족끼리라도 회혼례를 하려고 했으나 그 말 듣고 10년 늦추려고 해요.(웃음)”

-집안이 장수집안인가 보다.
“어머니는 91세까지 사셨고 아버지는 회갑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내 탓이라 여겨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요. 제가 6·25 전쟁으로 대학을 중단하고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어요. 임관 직전 큰 사고가 있었어요. 당시 생도회 회장이었던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퇴교 했어요. 제가 군법회의 받는 걸 보시고 충격을 받으셨어요. 또 한 번은 동아일보 필화사건으로 서빙고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면회 오셔서 충격을 받으셨지요.”

이만섭 전 의장은 ‘효자 의장’으로 소문나기도 했다. 이 전 의장의 어머니가 영남대 부속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이 전 의장은 매일 첫 비행기로 대구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국회 개원 시간에 맞춰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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