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원작자 류성룡이 새롭게 뜨고 있다
‘징비록’ 원작자 류성룡이 새롭게 뜨고 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3.13 11:30
  • 호수 4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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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등용해 임진왜란 치르고 뒷수습 한 명재상
▲ KBS-1TV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 류성룡역의 김상중이 열연 중이다. 류성룡은 초상화를 남기지 않아 얼굴 생김새를 알 수 없다.

드라마 ‘징비록’ 계기로 재평가 활발… 관련 서적 20여 종에 강연 잇따라
50세에 임진왜란… 의병 모집하고 훈련도감 설치, 천인에게도 기회 줘

지난 3월 1일 방영된 KBS-1TV 대하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류성룡(김상중 분)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자 윤두수(임동진 분)·정철(선동혁 분) 등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결국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모함에 불시 감찰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금부가 류성룡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깨끗했다. 유일하게 발견된 건 이순신 어머니가 아들과 가족을 보살펴주어 고맙다며 보낸 편지와 정성껏 만든 무명저고리 뿐이었다. 이는 강직한 윤두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천거에 대해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류성룡의 청렴결백,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을 천거한 이도 류성룡이다.
50~60대층 사이에 인기인 드라마 ‘징비록’ 방영을 계기로 류성룡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형서점에선 ‘류성룡의 말’, ‘류성룡과 7년 전쟁’ 등 류성룡을 테마로 한 도서 20여종이 팔리고 있고, 류성룡을 주제로 한 강연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류성룡(1542~1607)은 어떤 인물인가.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면 류성룡은 이 전쟁을 총괄한 사람이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일본 사이의 강화 협상을 지휘한 사람이 류성룡이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민심을 다독인 것도 그였다. 한마디로 선견지명적 인재 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특히 그가 쓴 ‘징비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임진왜란 서사를 구성하는데 기본적인 텍스트 구실을 한다.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 뒤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전의 것도 가끔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임진왜란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서경에 ‘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쓴 이유다. (중략) 이제 한가해져서 그동안 듣고 보고 겪은 일들을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에서 무술년(1598년 선조 31년)에 이르기까지 큰 줄거리만 기록한다. 임금께 보고한 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한 글, 공문서 및 자질구레한 기록을 그 뒤에 붙였는데 비록 보잘 것 없으나 모두가 그때의 일들이므로 버리지는 못한다.”
서애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년) 경북 안동 풍천면 하회리에서 의주목사·예조참의를 거친 류중영과 안동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세조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에 몰두한다. 퇴계는 류성룡의 그릇을 알아보고 “이 사람은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한다”는 말을 남겼다. 23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2년 후 문과시험에 급제해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선다. 30여년의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 벼슬을 시작으로 부제학, 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벼슬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권력 암투를 벌이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됐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한 류성룡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류성룡은 50세에 좌의정에 올랐고 이조판서를 겸했지만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어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때마다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류성룡의 나이 50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대를 편성했으며 새로운 화포와 무기를 생산했다. 천인을 양인으로 올려주는 면천법을 써 부족한 군인을 보충했다. 천인이라도 공을 세우면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1598년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해 은거하는 사이 그의 누명은 벗어지고 관직도 회복됐지만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7년간 왕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고향을 지켰다. 1601년 청백리에 올랐고 3년 후 ‘징비록’을 탈고했다. 그는 ‘농환재’라는 초가집을 지어 살면서 “사람들이 이욕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 살 수 있다”라고 자식들에게 청렴을 가르치기도 했다.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위로 이순신의 형과 막역한 사이였다. 류성용의 취미는 바둑이었다. 이순신과도 어울려 바둑을 두곤 했다. 서울에서 거주할 때 류성룡의 집은 남산 아래 묵사동이었고 이순신의 집은 명보극장이 있던 건천동이었다.
류성룡은 65세로 숨을 거두었다.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았고, 서울 남산 아래에 있던 옛집에는 1000여명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재밌는 점은 류성룡의 초상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공신이 되면 충헌부가 화사를 파견해 공신 초상을 그리게 했다. 선조는 3차례나 안동으로 화사를 내려 보냈지만 류성룡은 선조에 대한 섭섭한 마음에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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