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담아낸 팔순 거장의 ‘일필휘지’ 수묵화
한지에 담아낸 팔순 거장의 ‘일필휘지’ 수묵화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4.10 13:53
  • 호수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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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오채묵향-송영방’ 전
▲ 송영방 화백은 50여년간 작품활동을 하면서 실험성 짙은 추상화부터 실경산수화, 인물화 등 다양한 동양화를 선보였다. 사진은 2014년 作 청매(靑梅)

55년 작품 활동 집대성… 실경산수화‧인물화 등 80여점 전시
8폭 병풍에 담아낸 ‘홍매화’ 일품… “마지막까지 붓 놓지 않겠다”

가로 3m, 세로 1m 한지에 그려진 대나무는 옹골찬 기운이 느껴졌다. 먹과 물로만 표현된 ‘대밭’이지만 대나무의 곧은 기개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팔순을 앞둔 송영방(79) 화백이 올해 완성한 작품엔 이처럼 나이를 무색케 하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송영방 화백의 회고전 ‘오채묵향-송영방’ 전이 열리고 있다. 송 화백은 꾸밈없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풍격(風格)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동양화 작가이다. 동양예술정신에 기반을 두고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끊임없이 창출하고 있다.
‘오채묵향’(五彩墨香)은 먹의 농담(濃淡)과 건습(乾濕), 초(焦) 또는 흑(黑)을 말하는 것으로 먹색의 풍부한 변화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송 화백이 추상적 실험기법을 가미한 작품부터 실경산수, 인물화, 사군자 등을 먹으로 표현한 8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서울대 3학년까지 서양화를 전공한 송 화백은 ‘먹의 맛’에 빠져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60년대 초반 ‘묵림회(墨林會)’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대한민국미술‧동아미술대전’ 심사위원, 동국대 교수 등을 맡으며 작가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동양화를 그린 만큼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송 화백은 작품 활동 초기에는 수묵(水墨)을 통한 추상적 실험기법을 적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괴석(怪石) 수집가로도 유명한 그는 “괴석을 보면 산수의 경치가 아니라 추상적인 생각이 더 많이 떠오른다”고 했다. 송 화백은 수백만년의 세월을 겪으며 모양이 변한 괴석을 보며 깊은 계곡에 깎아지른 절벽, 그 아래 흐르는 시냇물, 외따로이 서 있는 소나무를 떠올렸고 이를 한지에 표현했다. 전시장 초입에 전시된 ‘뇌락’(磊落), ‘천주지골’(天柱地骨), ‘운근’(雲根)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특히 1969년에 그린 ‘운근’이 대표적이다. ‘하늘 기둥’을 의미하는 작품은 필선으로만 이뤄진 돌 그림으로 그의 초기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송 화백은 동양화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필로 써야지, 거기에 덧칠하고 개칠을 하게 되면 생동감이 없고 죽어버린다”며 ‘일필휘지’(一筆揮之)를 강조했다.
이런 철학은 그가 그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서 알 수 있다. 실경산수화는 조선시대 유행했던 화풍으로 송 화백은 산수화의 전통 화법을 토대로 1970년대부터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등지를 둘러보며 한국 산천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형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실적 표현보다는 자연을 보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그려낸, 즉 흉중구학(胸中丘壑)을 실현한 그의 실경산수화는 맑은 먹빛과 간결한 필치의 담백한 화풍(畵風)을 형성했다.

▲ 춤추는 산과 물, 2007년.

송 화백이 1980년대 집중적으로 제작한 ‘산과 물과 구름’, ‘춤추는 산과 물’ 시리즈는 그의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춤추는 산과 물’은 끝없이 펼쳐지는 강산의 모습을 먹의 농도를 이용해 율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설한을 이기고 추위를 이기고, 그 도장지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지조 때문에 매화를 좋아하게 됐다”는 송 화백은 스스로에 대해 매화를 아내로 삼은 ‘매처’라고 소개했다. 서울 성북동 집 마당에 청매화를 기르고 꽃이 피고 지는 걸 지켜보면서 여린 듯한 매화나무가 사실은 철골처럼 단단한 속을 가진 특징을 잡아냈다고 한다. 그는 괴석과 산수를 관찰하면서 연마한 탁월한 관찰력을 인물‧동물‧사군자 등을 그리는데도 발휘했다. 매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와 화조화는 은은한 묵향(墨香)이 배어 있다. 인물화와 동물화에는 우리 민족의 소박한 모습과 기질을 담았다. 대상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고 능숙하게 그려낸 인물화와 각종 동물의 생물학적 특징을 예리하게 집어 묘사한 동물화는 해학적이고 정감 넘치는 표현이 돋보인다.
이 중 백미는 최근작 ‘홍매화’이다. 8폭짜리(약 3m)병풍에 담긴 매화는 철골 같은 단단함과 묵의 유연함이 조화를 이룬다. 병풍을 뚫고 나올듯한 매화가지의 ‘기운생동’이 전해지고 추위를 이기고 꽃망울을 터트린 주홍빛 매화꽃송이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3살 때부터 붓을 잡았다는 송 화백은 “사람이 죽으면 ‘학생부군신위’라고 쓰는데 이는 ‘평생 공부하라’는 뜻”이라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더 좋은 그림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료는 2000원이며 65세 이상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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