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추상조각 만든 김종영을 추억하다
한국 최초 추상조각 만든 김종영을 추억하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5.15 15:12
  • 호수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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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의 삶과 예술’ 전

최소한의 손질만 하는 미학 추구… 학생 때 서예작품도 소개
대표적 공공조각인 ‘3‧1 독립선언기념탑’ 철거 비화 등 공개

1953년 개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는 파격적인 조각품 하나가 공개됐다. 당시 서울대 조소과 김종영 교수가 출품한 ‘새’가 평론가와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새’는 긴 부리와 가는 목, 두툼한 몸통 등 새의 특징을 간략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발표 당시 평단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관객을 우롱하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현재 ‘새’는 국내 추상조각의 세계를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 추상조각의 개척자라 불리는 김종영(1915-1982)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에서는 오는 7월 26일까지 ‘김종영의 삶과 예술’ 전을 진행한다.
김종영은 경남 태생으로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과 더불어 한국 미술을 이끌어갈 후진을 양성한 인물이다. 국전과 마닐라 국제전,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철재‧목재‧석재 등을 사용한 25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0년 ‘국가유공자사후대통령포상’ 등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종영의 성장과정과 학창시절 모습을 담은 주요 자료와 작품을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먼저 ‘김종영이 본 김종영’에서는 자각상(自刻像)과 자화상을 통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서히 늙어가는 작품 속 인물을 통해 한 예술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나무로 만든 자각상 ‘작품 71-5’(1971)이다. 나무의 무늬가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지문(指紋)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삶의 연륜을 나타내는 주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종영의 수업시대’는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을 모아놓았다. 김종영은 유년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서예를 배웠다. 생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종영은 1000여점의 작품을 남길 정도로 서예에 능했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학생서예작품전에 참가해 습자부분 1등상을 받기도 했다. 전시에서는 당시 보도된 기사와 서예작품을 통해 숨겨진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김종영은 1953년 3월 영국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런던국제공모전에 한국대표로 ‘나상’을 출품해 입상하기도 했다. ‘공공조각아카이브’에서는 김종영의 공공조각품 ‘포항전몰학도충혼탑’과 ‘3‧1 독립선언기념탑’에 관한 자료를 공개한다. 1963년 국민 성금으로 탑골공원에 세웠던 ‘3‧1 독립선언기념탑’의 경우 그에게 큰 상처를 남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79년 공원정비사업으로 철거되면서 몇 년간 공터에 방치됐는데 이 과정에서 김종영의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복원하기 위해 탄원서를 쓰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서대문독립공원에 복원되는(1992)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전시에서는 설치부터 철거 후 복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사진과 문서 등을 통해서 소개한다.
김종영은 자신의 예술론을 밝힌 에세이에서 작품 소재가 ‘인물‧식물‧산’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조각의 모티브’에서는 그가 인물‧식물‧산을 소재로 어떻게 추상조각을 만들었는지 공개한다. 사람의 신체를 표현한 드로잉과 이를 단순화해 만든 조각품을 함께 전시해 구체적인 대상에서 추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 사랑의 가공’에서는 김종영의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김종영은 ‘불각(不刻)의 미(美)’를 추구했다. 재료에 최소한의 손길만 더해 재료가 가진 특징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또 김종영은 ‘새’, ‘꿈’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작품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작품을 만든 연도를 표시하고 제작된 순서에 따라 숫자를 매긴, ‘작품 00-0’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면 1972년도에 3번째로 만들어진 작품은 ‘작품 72-3’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이는 순수하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작가의 고집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그는 대형작품도 많이 남기지 않았다. 대형작품의 경우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해 불각의 미를 추구하는 그의 작품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아 상반신 크기의 작품만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작품 76-11’이다. 맷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작품은 시계와 물레방아를 연상케 하는데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만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전한다.
아울러 전시에서는 유실돼 지금은 사진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은 작품도 소개한다. 김종영은 250여점의 조각품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생전에 그가 직접 작성한 작품목록에는 1954년 국전 출품작인 ‘이브’를 비롯해 ‘포항전몰학도충혼탑’과 ‘3‧1 독립선언기념탑’ 등의 작품을 넣지 않았다. ‘이브’의 경우는 작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직접 파기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번 전시와 함께 서울대미술관에서도 7월 26일까지 ‘김종영의 조각, 무한의 가능성’ 전이 진행된다. 서울대 전시는 한국 최초의 추상조각으로 평가받는 ‘새’(1953), 여인의 유연한 곡선과 볼륨을 덩어리의 집합으로 표현한 ‘욕후(浴後)’(1950년대 초) 등 서울대 재직 시절 만든 작품들을 선보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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