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에 되새기는 이승만의 업적
광복 70주년에 되새기는 이승만의 업적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5.15 15:19
  • 호수 4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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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건국·공산화 저지·한미 동맹
▲ 1948년 5월 31일 중앙청 의사당에서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승만(1875~1965)은 보수·진보 양쪽에서 욕을 먹는다. 보수는 이승만이 4·19를 촉발한 독재정치인이라 하고 진보는 그가 분단의 주도자로 통일을 저해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냈고, 정부를 세웠으며, 6·25 전쟁 당시 땅 한 평 빼앗기지 않았고, 미국을 매개로 우리나라를 세계로 나아가게 만든 지도자였다는 평이 대세다. 최근 출간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안병훈 역저·기파랑)란 책에서 그의 업적 4가지를 요약했다.


◇독립운동=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교전국들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여기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스승이었던 윌슨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게 돼 있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윌슨은 한국인 대표가 회의장에 나타나면 일본의 항의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이승만을 오지 못하도록 했다.
같은 해 3월 10일,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서재필과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대회를 준비한다. 1차 한인대회를 마친 후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필라델피아 중심가에서 시가행진을 벌였고 미국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으로 선출된다. 그에 따라 한인대표자회의는 단순한 독립선언을 넘어 독립 후의 건국 구상을 논의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건국=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합의했다. 이승만은 가장 먼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둘로 쪼개져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이승만은 소련이 통일된 자유정부 수립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만큼 한반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거주하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미국 결의안이 찬성 31, 반대 2, 기권 2로 통과됐다. 그에 따라 남한 군정은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총선거를 실시했다.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7월 17일, 대통령중심제를 골격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공산화 저지=6·25 전쟁의 첫 휴전 제의는 야코브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표의 라디오 방송에서다. 이승만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이미 제거된 38선을 또 다시 재생시키는 어떠한 휴전에도 반대했다. 그는 유엔군이 휴전을 한다면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때까지 단독적인 행동을 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말대로 전쟁으로 인해 남한이 잃은 땅은 한 평도 없었다.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던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의 제거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는 냉전 체제에서 그런 인물을 쉽게 내칠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장기경제원조 및 2억 달러 공여 ▷한국군 증강계획의 지속 ▷한미고위급회담 정례화 등이다. 당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한반도 평화유지=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8일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보다 공이 많은 대통령이었지만 이승만은 끊임없이 진보좌파들에 의해 친일파 등으로 폄훼되고 있다. 역대 정권들은 좌파의 눈치를 보느라 이승만 기념관 하나 세우지 못한 채 건국의 올바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인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그가 없었다면 이 땅은 일찌감치 공산국가가 됐을 것이다. 이 땅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유능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역대 대통령 중에 이승만보다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있는가. 프린스턴대 박사학위를 취득한 교육수준, 동서학문에 대한 박학함, 지식의 깊이, 역사의식, 청년기 문제의식, 글로벌 리더로서의 수준, 국가철학, 위기극복 지도력 등에서 역대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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