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좋은 여행지는 실크로드… 장수국가에다 고려인들이 많이 살아요”
“노년에 좋은 여행지는 실크로드… 장수국가에다 고려인들이 많이 살아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05.29 13:38
  • 호수 4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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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살에 오지여행 시작한 골프공 제조업체 회장 도용복
▲ 아프리카 원주민 아이들과 함께 한 도용복 회장.

고엽제 후유증 앓은 게 여행 계기… 22년간 147개국 돌아봐 ‘아마존이 백미’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한 아마추어 음악도… 루치아노 파바로티에게 사사

“가슴이 떨릴 때 떠나야 해요. 다리가 떨리면 못 떠나니까요.”
오지여행가이자 골프공 제조업체 ‘사라토가’의 도용복(72) 회장이 하는 말이다. 그는 50세 되던 해 배낭을 둘러메고 아프리카 행 비행기를 탄 이후 지금까지 147개국을 돌았다. 미국·유럽 같은 선진국이 아니라 아프리카·중남미·중앙아시아 등의 오지국가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아마존으로 5차례나 찾았다. 1년 중 300일은 일 하고 강연하고 책 쓰고, 나머지 65일은 여행을 떠난다. 그에게 ‘노인들에게 권할만한 여행지’를 묻자 주저 없이 ‘실크로드’를 꼽았다.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장수국가들을 통과하는 옛 무역로다. 공기 맑고 과일이 풍부하고 섭생과 관련 배울 점이 많다. 러시아 등지로 이주해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낯설지 않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다. 지난 5월 말 도 회장을 만나 여행의 참맛과 남다르게 살아온 과정을 들었다.

-최근에 다녀온 곳은.
“작년에 65일 동안 나이지리아·시에라리온·카메룬·세네갈 등 서부아프리카 10개국을 돌았어요.”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나.
“가봉이에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잘 사는 국가예요. 새마을사업 덕분이라고 해요. 그 나라 봉고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해 경제부국으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그 아들이 대통령으로 있는데 보좌관이 한국에서 건너간 태권도 사범이에요. 아버지가 대통령 자리와 함께 보좌관까지 물려주면서 ‘외국인에다가 운동 하는 사람이라 믿어도 된다’고 했대요. 또 다른 이유라면 슈바이처 박사의 거룩한 삶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가봉에 살았다고.
“적도 남쪽 75km 지점에 ‘랑바레네’란 작은 마을이 있어요. 슈바이처 박사가 평생 의료봉사를 펼친 곳이지요. 슈바이처는 의사이면서 바흐를 좋아한 음악가였어요. 순회 연주와 음반 취입으로 병원을 운영했어요.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병원에 슈바이처 박사가 사용했던 의료기·신발·안경 등 유품과 침실, 서재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요.”

-지난해 시에라리온에 에볼라바이러스가 돌았었다.
“제가 떠난 후 좀 지나서 병이 생겼다고 해요. 저는 괜찮은데도 친구들이 제 곁에 가까이 오지 않더라고요(웃음).”

-여행 중 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건강하면 어떤 병에라도 잘 걸리지 않아요. 풍토병이 문제인데 요즘 약들이 좋아져 걱정 없어요. 말라리아 같은 건 감기 정도로 쳐요. 약을 사먹으면 거의 100% 나아요. 약값도 싸고요.”

-왜 오지만 고집하나.
“유럽의 도시를 간다면 서울에 있는 게 나아요. 외국의 첨단 유행이나 시설은 서울에 다 들어와 있거든요. 편하게 다녀오는 여행은 저에게 남는 게 없어요.”

-여행을 계속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저에게 여행은 ‘길 위의 학교’에요. 항상 보고 배울 게 많아요. 몸이 아파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을 할수록 몸도 마음도 좋아지면서 돈에 대한 욕망보다는 자연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나눔에 대한 열망이 커지는 걸 느낍니다.”

-늘 혼자 떠나나.
“여행은 둘이서 못해요. 서로 입맛, 습성이 달라 나중에는 원수가 돼요. 집사람하고 47일 동안 중남미를 돌다 중간에 이혼할 뻔했어요. 아내는 도시의 백화점을 좋아하는데 저는 오지만 찾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서로 말을 안 한 채 남은 여행을 하자니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름다운 경치를 봐도 감흥이 없더라고요. 그 이후론 가자고 해도 집사람이 따라나서지 않아요.”
경북 안동 출신의 도용복 회장은 바이올린·오르간이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 컸으나 부친이 병으로 사망한 후 가세가 기울었다. 베트남에서 3년여 땀 흘려 번 돈을 밑천 삼아 20대 초반에 부산 서면 로터리에 30평짜리 전자제품 대리점을 차렸다. 하루 4시간씩 자며 부지런히 일해 ‘판매왕’ 자리에 오르자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점포를 방문해 격려해주기도 했다. 도 회장은 “냉장고 팔아 모은 돈으로 구입한 건물들이 나중에 보니 다 요지에 들어가 있더라”며 “지금은 구입가의 10배 이상 뛰었다”고 말했다. 25년간 해오던 대리점을 접은 후 직원 1000여명을 두고 핸드백 제조업에 손을 댔지만 민주화 바람이 불며 노조의 압력 등이 거세져 공장 문을 닫았다. 현재는 부산·용인에 공장을 둔 골프공 제조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대구한의대 특임교수, 주한 엘살바도르 명예영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고.
“당시 공무원 월급이 180원일 때 의무병이었던 저는 200원을 받았어요. 3개 중대 포경수술 해주면서 받은 달러도 엄청났어요. 지금 같았으면 영창 감이겠지만요.”

-여행을 다니게 된 계기는.
“베트남에서 가끔 미군 헬기가 머리 위에 나타나 물을 뿌렸어요. 더우니까 그 순간에는 단비처럼 고마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 고엽제 성분이 섞여 있었던 겁니다. 그 영향으로 40대부터 고혈압·당뇨병에다 원인을 모르는 피로감 등에 시름시름 앓았어요.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못 가봤던 곳을 가고 싶었어요.”
-처음 떠난 곳은 어딘가.
“케냐·우간다·스와질란드… 아프리카에요.”

-어떤 식으로 여행하나.
“저는 짐이 아주 적어요. 옷도 현지에서 중국제 몇 달러짜리 사 입고 버립니다. 밥그릇을 들고 다니는 건 바보에요. 10달러만 내면 고구마·바나나·아보카도를 한가득 줍니다. 침낭과 모기장만 가지고 다녀요. 두 개 합치면 딱 베개에요. 공항에서 그거 배고 자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우리나라 60년대에 흔히 보던 구두 닦는 소년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지요. 5달러만 주면 구두통 맡겨두고 앞장섭니다. 하루 종일 같이 지내면서 친해지지요. 슬쩍 ‘너희 집에 가볼 수 있니’ 하면 못산다고 부끄러워 해요. 겨우 지붕이 있는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내는 식입니다.”

-오지가 위험하지 않은가.
“아마존에서 함께 걷던 가이드가 독사에게 물려 40여분 만에 온몸이 파랗게 변해 죽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본 적이 있어요. 남미에서 차로 이동할 때 시속 220km로 달려야 해요. 느리게 가면 총에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아프가니스탄에선 지뢰를 밟아 죽을 뻔 한 적도 있고 에콰도르에서는 뒤에서 목을 조르면서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는 2인조 강도를 만나기도 했어요.”

-그래서 떠나기 전 유서를 쓴다고.
“제가 자식이 4명이에요. 그 애들 싸움시키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이상해요. 똑같이 나눠야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심리적으로 부모한테 잘 하는 자식에게 더 많이 주게 됩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새로 쓰게 돼요.”

-147개국을 돌아본 소감은.
“어디를 가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것, 특별한 사람도 특별한 곳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그리고 내가 하는 대로 반응이 온다는 사실, ‘선을 쌓는 이에게는 경사스런 일이 생긴다’(積善之人 必有餘慶·명심보감)는 옛 가르침을 실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골프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2000년 중앙아시아를 돌 때 우즈베키스탄에 들렀어요. 시차 적응을 위해 골프를 치곤합니다. 주변 5개국에서 유일한 골프장인 타슈켄트 레이크사이드를 찾았어요. 철새도래지로 전체 부지 155만㎡ 가운데 만년설이 녹아 이뤄진 호수만 46만㎡로 멋진 곳입니다. 골프장 문을 닫는다는 말을 듣고 지인 몇몇을 주주로 참여시켜 인수했어요. 고려인 캐디를 고용해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저술과 강연 활동도 활발하다고.
“그동안 사진집 ‘엘 콘도르 파사’(1998)와 여행기 ‘세상의 아들딸들아, 살아있으라 사랑하라’(2011), ‘여행의 위대한 순간, 그래도 살아있으라’(2015) 등을 펴냈어요. 60일 동안 오지를 돌아다니다보면 할 얘기도 많이 쌓여요. 정부기관·기업·학교 등지에서 한 달 20여회 강연합니다. 최근 부산의 검찰청·국세청·경찰청 등에서 강연을 했고요. 대구한의대에서 실용음악을 강의하고 있기도 해요.”

-강연료도 꽤 되겠다.
“월 2000만원 정도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받지 않고 무료로 하거나 오히려 도와주기도 합니다.”

-오페라에도 출연했다고.
“부산오페라단이 공연한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일본인 야마도리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젊었을 적에 음악다방 DJ도 했고 중창단을 20여년 이끌어오며 지휘도 합니다. 외국에 나가면 으레 오페라부터 한편 보고 시작해요. 20여년 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음악원에서 유학한 딸 소개로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에게 사사한 적이 있어요.”

도용복 회장은 “80까지 오지여행을 계속할 것”이라며 “다음 여행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산다는 세이셀과 마다가스카르가 될 것”이라며 웃었다.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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