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부 여인은 왜 제주 노비가 됐나?
서울 사대부 여인은 왜 제주 노비가 됐나?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5.29 14:29
  • 호수 4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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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 ‘서울할망 정난주’는 비극적으로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떠나 보낸 한 여인이 모성애와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다.사진제공=문화마케팅진흥원

백서사건 일으킨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 삶 다룬 창작 뮤지컬
종교색 지우고 로맨스 요소 첨가해 ‘대학로용 뮤지컬’로 탈바꿈

정조가 죽고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대비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한 1801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던 황사영은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받은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천주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편지를 써 중국 천주교회에 전달하려 했으나 도중에 적발된다. 황사영은 이 ‘백서사건’으로 ‘능지처사’를 당했고 사랑하는 그의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헌은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지난 5월 26일 서울 대학로 여우별씨어터. 무대 위에는 능지처사 당한 황사영이 끌려나가고 그의 아내 정난주가 두 살배기 아들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은 37년간 그녀가 겪어야 할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를 아는 관객들의 숨죽인 소리가 더해져 극장 안은 무거운 슬픔에 휩싸였다.
신유박해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돼 37년간 노예로 살았던 정난주의 일대기를 그린 ‘서울할망 정난주’가 오는 6월 21일까지 대학로 여우별씨어터에서 공연 된다.
2013년 ‘가시세비낭’이란 이름으로 초연된 뮤지컬은 영화 ‘슈퍼문’, ‘백분의 일인치 프롤로그’, ‘파가니니의 세탁소’ 등을 통해 섬세하고 감성적인 영상을 선보인 이지원 감독 손에서 재탄생한다.
2013년과 2014년 공연은 CY씨어터 등 카톨릭단체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종교적 색채가 강했지만 대학로로 무대를 옮기면서 일반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시대극 성향의 뮤지컬로 탈바꿈했다.
임종을 앞둔 늙은 노비 정난주는 37년 전 추자도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하나뿐인 아들 황경헌을 그리워한다. 능지처사 당한 남편 황사영을 비롯해 일가족이 참수를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천주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려 했다.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노비들 사이에서 ‘서울할망’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이 됐지만 그녀는 드문드문 참혹했던 박해의 기억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동료 노비들이 그녀를 어머니처럼 모시며 따라도 그녀는 점차 기력을 잃어간다.
작품은 특별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제주도 바람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낸,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평범한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정난주는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젖먹이 아들을 낯선 추자도에 떠나보내고 평생을 멸시받으며 고통 받았던 보통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옥 같은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자식에 대한 모성애였다. 원작자이면서 주연 ‘늙은 난주’ 역을 맡은 배우 이엘리는 이 작품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사대부여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너무나도 박복한 삶을 산 정난주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힘이었다”면서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뮤지컬을 보고 세상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지원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영화적인 장치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별다른 소품 없이도 무대 뒤 배경에 설치한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상을 통해 시간의 변화, 인물의 심리, 사회 분위기 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초연 당시 17곡이었던 노래를 24곡으로 늘린 대신 공연시간을 120분에서 100분으로 줄여 속도감은 높이고 감동은 배가시켰다. 또한 황사영과 정난주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고 환상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하면서 일반 관객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또 이번 작품에서 정난주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도 눈여겨봐야 한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는 정순대비의 박해가 시작되자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한다. 황해까지 도망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끝내 참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때 주문모 신부가 자신의 심정을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장면이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다.
아울러 늙은 난주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인물들이 철저한 고증을 거친 제주도 방언을 사용하는 것과 모든 음악을 전자피아노와 타악기를 이용해 라이브로 연주한 것은 이 뮤지컬 만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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