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눈물이 나고, 고백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삶에는 눈물이 나고, 고백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 이호선
  • 승인 2015.08.07 11:12
  • 호수 4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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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혹은 사랑하노라 고백을 해본 적이 있는가? 두 순간 모두 우리는 짜릿하다. 그 장면은 석판처럼 각인이 되고 두고두고 기억이 되어 위기의 순간에 삶을 지탱해주는 투명버팀목이 된다. 짧은 순간이 긴 기억으로 남는다.
태어나면 자라고, 자라면 모든 것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100층이 넘는 건물을 붙들던 쇠도 녹슬고 마냥 5월일 것 같은 청춘도 주름 잡힌다. 그리고 모두들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흙인지 무(無)인지 시작인지 알지 못하나, 종국에는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
장례식이 잦은 요즘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들은 한결같이 울었다. 그리고 마치 교과서를 읽듯 같은 말들을 한다. 이럴 줄을 몰랐다고, 돌아가시니 이제야 알겠다고, 살아계신다면 지금처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종국에는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잃고 나면 생각나고 지나고 나면 그립고 떠나고 나면 아쉬워지고 보내고 나면 눈물이 난다. 열정의 세월 동안에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 왜 어려운 일일까? 밤새 두들겨 패서 맞아 생긴 흉터가 아직도 있다며 아픔을 몸에 새긴 아들이 잔인했던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뭘까?
평생 고생하며 홀로 아들 셋, 딸 둘을 시집장가 다 보내고 손주 8명을 키워내고 결국 딸네집에 오는 길 돌부리에 넘어져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머리가 희끗한 막내딸이 울고 있다.
한 번도 엄마를 모시러 현관문을 열고 나가 본 적이 없는 그 딸이 엄마가 그립다며 목 놓아 울고 있다. 어머니의 삶에는 눈물이 나는데, 딸의 고백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장면은 대부분 비슷하다. 같은 집에서 끓이는 것도 아닐 텐데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 맛도 늘 같다. 찔끔 눈물이 나는 조문을 하고 양반다리를 하고 테이블에 앉아 같이 조문을 온 사람들과 떠난 자를 아쉬워하는 것은 고작 3분 이내이다.
무심한 아버지 이야기도 그리운 어머니 이야기도 과거보다는 임종의 순간에 이야기 주제가 집중된다. 그마저도 3분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는 이야기의 주제는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어떤 경우 눈치를 봐가며 웃기도 한다. 타인의 삶이 끝나는 것도 3분이면 족하고 나의 일상은 계속 이어진다.
광복절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마다 큰 소리로 절규하듯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고 들었다. 기록 영화 같은 광복의 이야기들은 3분으로 끝난다. 눈물과 핏물을 섞어 얻은 두 글자 ‘광복(光復)’은 최근 유행하는 영화 ‘암살’을 통해 듣고 있다.
이 영화가 애국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광복이야기는 3분, 그리고 영화 ‘암살’의 주인공 전지현의 임신 소식은 방송가가 떠들썩할 만큼 대단하고 길다. 광복은 삶이었고, 영화 ‘암살’은 소설적 고백이다. 짧은 3분의 광복이야기에는 심드렁하고, 영화 주인공에는 열광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장례식 조문 같은 3분짜리 광복이야기에 눈물이 나야한다. 딸의 눈물 속에서 그리고 아들의 상처 속에서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핏물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는 것(光)’이고, 그것이 ‘돌아보는 것(復)’이다.
다시 광복절이다. 멈추어서 바로보고 돌아봐야하는 마디이다. 광복에 기뻐한 적도 없는 세대가 광복을 만들어낸 세대들 앞에 서서 멈춰 바로보고 돌아봐야 하는 짧은 시간이다. 이 찰라같은 시간 동안이나마 우리는 광복에 눈물이 나야할 것이다. 그 눈물이 바로 고맙다는 그리고 지키겠노라는 다짐의 고백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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