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무덤에 묘비를 세우다
왕평 무덤에 묘비를 세우다
  • 이동순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8.28 14:03
  • 호수 48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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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원제목: 황성의 적)란 노래는 1930년대 당시 식민지 백성들의 상처받고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준 기막힌 절창이었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왕평(본명 이응호)입니다. 작곡가는 경기도 개성 출생의 전수린, 가수는 역시 개성 출신 이애리수(본명 이음전)입니다. 왕평은 어려서 어머니 잃고 서울의 친척 댁에서 성장했지요. 배재중학 마치고 조선배우학교를 거쳐서 악극단 ‘연극사’(演劇舍)의 단장자리까지 올랐습니다. 말이 단장이지 영세하고 보잘것없는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며 살아가는 고달픈 유랑연예인이었지요.
경기도 개성에는 멸망한 고려의 왕궁 터만 남아있는 만월대란 곳이 있는데 왕평, 전수린은 어느 날 그곳을 다녀와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노래 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가을달밤의 애상과 비감한 정취, 악극단생활의 유랑과 비애, 망국의 슬픔과 서러움 등의 정서가 혼합된 그 노래를 극단의 여배우 이애리수에게 부르게 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무척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왕평은 1940년 평북 강계 공연에서 다른 출연배우의 대역으로 무대에 올랐다가 쓰러져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세상을 떠난 대중연예인입니다. 그때 왕평은 33세의 노총각, 인기 만담가였던 동거녀 나품심(羅品心)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요. 나품심은 마치 정실부인처럼 머리를 풀고 사랑하는 왕평의 화장한 유해를 가슴에 안은 채 애인의 부친이 살고 있던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수정사란 사찰 맞은편 북쪽 산기슭에 묻었습니다. 이날 서울의 다수 동료연예인들이 함께 내려가서 왕평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가수 남인수는 ‘오호라! 왕평’이란 장송곡을 취입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일제경찰이 왕평의 무덤 매장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분묘는 봉분조차 없이 마치 강아지무덤처럼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왔습니다. 그날 이후로 왕평은 세월의 풀덤불에 묻힌 채 완전히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진작 왕평의 업적에 대하여 주목하고, 그의 삶과 대중문화활동을 연구해서 학술적으로 정리해보려는 뜻을 가졌었는데요. 수년 전 어렵게 수소문해서 왕평 선생의 유족들을 극적으로 찾아냈고, 팔순 아우의 안내를 받아서 왕평 묘소에 당도할 수 있었지요. 왕평 무덤에 오르니 현장은 말 그대로 ‘황성옛터’였습니다. 시절은 늦가을이라 가랑잎들이 무덤 위에 켜켜이 쌓여있었는데, 수북한 낙엽을 걷어내니 봉분도 묘표도 없이 적막하고 초라한 무덤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왕평 선생과의 첫 대면입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쓰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황성옛터’ 가사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시켜 주는 듯 처연하고 참담한 광경에 저는 현기증으로 몸의 중심조차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간략한 제물을 무덤 앞에 차려놓고 우선 한 잔 술을 부어올리니 가슴 속에서 비감한 심회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힘들게 메고 올라간 아코디언을 가슴에 안고 저는 왕평 선생 무덤 주변을 빙빙 돌면서 3절까지 연주했습니다. 제 눈가에선 저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 후 저는 어느 모임에 나가서 벗들에게 그날의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모두들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한국의 훌륭한 대중문화인의 무덤이 이토록 방치되고 있다니 그건 안 될 말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뜻을 모아 묘비라도 세우자는 의견을 모았지요. 유명 서예가의 글씨로 ‘왕평 이응호지묘-황성옛터 시인’이라 새겼습니다. 그렇게 제작한 묘비를 승합차에 직접 싣고 달려가서 저와 벗들은 함께 힘을 합쳐 조촐한 묘비를 세웠습니다. 묘사(墓祀)를 지낸 다음 제가 그동안 틈틈이 연습해둔 색소폰을 들고 가서 ‘황성옛터’를 구성지게 연주했답니다. 나팔소리가 왕평 무덤의 주변 하늘에 무지개처럼 서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왕평 선생의 넋이 꿈에 와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종내 나타나지 않아서 서운했지요.
이 모든 과정을 어느 방송사에서 ‘왕평-조선의 세레나데’란 타이틀로 한 시간 분량의 TV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방영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한국가요사와 관련된 여러 일들을 해왔으나 가장 보람을 느낀 추억은 바로 왕평 선생 무덤 앞에 묘비를 세운 것입니다.
한국대중문화사의 빛나는 위인에 대하여 너무도 관리가 소홀하고 무심한 우리의 문화행정에 대하여 새삼 서운하고 개탄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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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2015-09-02 18:43:00
이동순 교수님의 저서 '번지없는 주막'을 읽고 우리 대중가요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감명을 받고 대중가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왕평 칼럼을 보고 무덤 주변을 돌며 연주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늘 그러하듯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저의 가슴을 적십니다. 저도 꼭 한번 찾아가서 조촐한 술이라도 한잔 올리겠습니다.이동순 교수님, 대중가요를 위한 더많은 활동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