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시리즈]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인문학 산책 시리즈]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3.11 13:24
  • 호수 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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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순환의 고리가 한반도 평화의 열쇠

“장관·대학교수·언론인… 그러나 평생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삶이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 굴렁쇠 소년 아이디어… 전쟁고아 이미지 불식

“서구인은 승부를 가릴 때 동전을 던진다. 동전은 앞면 뒷면뿐이어서 단 두 개의 선택지로 승패를 가른다. 그러나 한·중·일은 모두 가위바위보로 한다. 서로 물고물리는 순환의 장에서는 누구도 절대강자로 군림할 수 없다.”
이어령(82) 전 문화부장관이 일본에서 먼저 펴낸 저서 ‘가위바위보 문명론’ 중 일부이다. 이 책은 일본 교과서에 인용될 정도로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력이 컸다. 한·중·일 3국의 놀이문화인 '가위바위보'가 동양은 물론 서양의 역사와 문화, 정치까지 해석하는 기발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즉, 바위는 가위를 이기고 가위는 보자기를 이긴다. 그리고 보자기는 최하위가 아니라 최상위에 있는 주먹을 이김으로써 동그란 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 순환의 관계가 대륙과 해양 사이에 낀 반도의 절묘한 운명과 같으며, 한국이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한국이 평화의 수호자가 될 수 있다는 근거는 이렇다. 한국은 때로는 중국·러시아 등 대륙세력에, 때로는 미국·영국·일본 등 해양세력에 더 큰 영향을 받으며 생존해왔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대륙세력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가 남북이 분단된 뒤 해양문명을 따라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북한은 중국의 대륙세력에 사실상 포함돼 있다. 북한이 대륙의 일부가 되고 우리가 인공적인 섬이 돼 반도가 사라진 것이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본질이다. 해양과 대륙이 맞부딪치는, 그래서 문명의 흐름이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는 곳에 자리한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을 활용하면, 바로 그 덕분에 우리가 세계평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을 예로 들었다. 독일은 한 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지만 지금은 유럽연합의 중심국이 됐다. 괴테 같은 문인 지식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문화에 바탕을 두고 세계문학을 완성한 괴테의 힘이 유럽 전체를 뭉치게 했다. 그처럼 한반도에서 대륙과 해양이 상생․공생하는 방법도 문화 안에 있다고 한다.
충남 아산 출생의 이어령은 196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동대학원을 나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1967~89)를 지냈다. 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문학사상’ 주간(1973~85), 문화부장관(1990~91년) 등 역임했다. 저서로는 ‘흙 속에 바람 속에’, ‘신한국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이 있다.
일찍부터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그는 장관 시절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내놓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3조원이 넘는 이 계획은 ‘꿈꾸는 자의 타령’, ‘거품 정책’ 등의 논란만 불러일으키고 사장됐다. 문화부장관 시절 일화 한 토막.
외무부가 유엔본부에 전시할 문화재를 모집했다. 어떤 문화재로 할지는 문화재 소관이었다. 그런데 외무부는 제멋대로 신라금관으로 정하고 레플리카(복제품)를 전시하기로 한 뒤 문화부에 사후 통보했다. 이어령 장관은 대노했다. 외무부에 항의했지만 이미 청와대 사인이 떨어진 뒤였다. 결국 이 장관은 대통령 면담을 신청, 자신의 아이디어를 밝혔다. 그는 “신라금관 모조품은 사이즈가 작아 눈길을 끌 수 없으니 88서울올림픽 때 사용한 ‘용고’(멕시코 큰소의 가죽으로 만든 대형 북)나 ‘월인천강지곡 목판 인쇄본’을 확대 복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바로 외무부장관을 찾아 “나 노태웁니다. 이어령 장관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이 뒤집어지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이어령 전 장관의 경력 가운데 대중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건 역시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장면이다. 그는 돈을 쏟아 붓는 식의 화려한 행사들로 가득 채우던 관행을 깨고 드넓은 경기장 위에 평화로이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 한 명만 남겨뒀다. 그때까지 서구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던 한국의 전쟁고아 이미지를 단숨에 반전시키며 동양적 여백의 미까지 세계에 알린 성공적인 퍼포먼스였다.
장관·대학교수·언론인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이 전 장관은 최근에 뜻밖의 고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만큼 고독한 삶을 살아온 이도 드물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 속에 살았다. 한국처럼 모든 것이 정치화 되고 분파된 데서 외톨이로 모든 적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내 편 없이 살았다. 문단 정치 밖에 있었고 언론계에도 오래 있었지만 나를 언론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학에서도 학과장도 해본 적이 없었다. 5~6년 주기로 프랑스·미국·일본 등 바깥에 가서 살지 않으면 못 견뎠을 정도였다. 고독한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셈이다. 만약 내가 인사이더로 매몰됐으면 지금 평범한 늙은이, 글 써서 돈 몇푼 벌어 집 한 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남들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면 다른 우물을 판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물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갈증 그 자체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0세 먹은 피터 팬처럼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로 사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문학을 하게 된 동기가 죽음 때문이었다고도 고백했다.
“나는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어머니 코에다 손을 대서 숨 쉬는 거 확인하고 잠들곤 했다. 6세 때부터 끝없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권력이 어디 있고, 돈이 무슨 소용인가, 누구나 공평하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안 죽을 순 없지만 죽음 이상의 가치를 만들지 않는 한 사형선고 받은 채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소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 이런 것들이 계속 문학에서 머무르게 한 것이고, 세속적 가치관보다 존재론적 사유를 하게 한 것이고 마지막에는 종교문제로 들어갔다.”
이어령 전 장관은 최근 중앙일보 고문직을 그만두고 서울 평창동에 위치한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있으며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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