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거장들… 그들은 가도 향기는 남아
인문학 거장들… 그들은 가도 향기는 남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4.22 11:19
  • 호수 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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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분야의 대가들이 하나둘씩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다. 지난 4월 6일 102세로 눈을 감은 원로 문화예술평론가 박용구 선생과 4월 19일 세상을 등진 극작가 신봉승(83) 선생 얘기다. 고인들은 ‘백세시대’ 신문의 ‘인물 포커스’에 나올 때만 해도 건강에 별 이상이 없고 정정한 모습이었다. 채 2년이 안된 짧은 시간에 유명을 달리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박용구 선생은 서울 평창동에 쭉 살다가 눈을 감기 직전 경기도 파주요양병원에 있었다.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라는 참극을 겪은 한반도의 척박한 예술 토양에서 음악무용평론가·뮤지컬제작자·극작가·연출가 등 르네상스적 문화인으로 활동해온 인물이다. 해방 후 최초로 음악교과서 ‘임시 중등음악교본’(1945년)과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1948년) 등을 썼다. 5·16 혁명 직후 북한의 가무극에 필적하는 남한의 가무단이 필요하다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요청을 받고 ‘예그린’을 창단했다.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은 제주도 설화 ‘배비장전’을 각색한 뮤지컬이었다. 박용구 선생은 타이틀을 고민하던 중 제주 출신 여성단원에게 ‘서로 밀회하는 걸 제주말로 뭐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여성단원이 ‘살짜기옵서예’라고 대답하자 ‘그거 재밌다’며 그 자리에서 제목을 바꾸었다. 동명의 주제곡을 가수 김세레나 등이 불러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박용구 선생은 100세가 넘어서도 저술과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담은 저서 ‘먼동이 틀 무렵’을 펴냈다. 강연을 통해 ‘현대의 뮤지컬이 서민적이고 풍자적인 본연의 의무를 잊고 있다’며 뮤지컬의 위기를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슬프다고 생각 안하고…삶과 죽음이란…이렇게 보면 맘이 편안하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억만개 별들 중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큰 별이 되는지 작은 별이 되는지는 살아봐야 알겠지. 내 묘비명도 별 하나를 그려놓았다”고 대답했다.
신봉승 선생의 사인은 폐암이다. 그렇지만 생전에 무심했다. 항암 치료도 거부한 채 폐암과 관련된 어떤 정보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2년 전 어느 날 인사동 한복판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별 불편함을 못 느껴, 약을 먹는다거나 언제까지 고쳐야한다는 생각 없이 지낸다”며 빙긋이 웃기도 했다.
그는 강원도 강릉의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던 1961년, 국방부가 300만 환을 내걸은 시나리오 현상공모에 ‘두고 온 산하’라는 작품을 응모해 당선됐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이 넘는 상금으로 서울의 유명양복점에서 친구 20여명의 옷을 맞춰주는 통 큰 인심을 썼다. 내심으로는 앞으로 수많은 원고청탁과 함께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란 사실이 바로 드러났다. 어디서도 원고청탁이 오지 않자 조용히 강릉으로 돌아갔다. 이미 ‘현대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했지만 이 수상을 계기로 시나리오 작가로 나섰다. ‘하숙생’ ‘독짓는 늙은이’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마다 대박을 터트렸다. 방송국에서도 러브콜이 잇따랐다. 그가 등장하면서 야사 중심의 사극은 방대한 독서와 고증을 통한 정통 역사물로 물꼬를 트게 됐다.
50세부터 8년간 방영된 대표작 ‘조선왕조 5백년’의 모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국역이 되기 전이라 혼자서 떠듬떠듬, 때론 한학자의 도움을 빌려 원전을 두세 번 완독했다. 그는 식민사학에 짓눌린 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을 바로 잡는데 기여한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에서는 임금이 제 맘대로 한 적이 없다. 선비들은 임금에게 직언하고 배운 대로 행했다. 신하들이 임금을 무턱대로 따라 한 적이 없다”.
500년 왕조 임금들의 지혜로운 정치철학을 꿰뚫고 있는 그의 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비 오는 ‘곡우’(穀雨), 고인의 가는 길이 편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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