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청춘’
타계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청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6.03 15:06
  • 호수 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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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타계한 김재순(1923 ~2016)전 국회의장은 작가 최인호(1945~2013)씨와 각별한 사이였다. 김 전 의장이 창간한 잡지 ‘샘터’에 최씨가 40년 가까이 글을 연재했던 인연에서다. 최인호씨는 1975년부터 ‘샘터’에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남겼다. 최씨의 남매 도담·다혜가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들·딸 낳기까지의 과정을 많은 독자들과 공유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자신의 사생활을 그렇게 오래 동안 낱낱이 밝히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1991년 김 전 의장은 최씨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내용의 편지 한통을 보냈다.
“삼복지절에 존체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신지오? 소생 국회의장직을 물러난 지 1년이 지났습니다만 그동안 이렇다 할 소식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여기 제가 평소에 애송하고 있는 ‘청춘’이란 이름의 시를 보내드리면서 용서를 구하오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YOUTH(청춘)
청춘이란 인생의 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씩씩하고 늠름한 의지력,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정열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의 청신함이다.
청춘이란 겁을 타지 않는 용맹심, 안이를 물리치는 모험심을 말한다.
때로는 스무 살의 젊은이에게보다는 예순 살 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었다고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었을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더하지만 정열을 잃으면 마음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은 기력을 잃게 하고 정신을 쓰레기로 만든다.
예순 살이건 열여섯 살이건 사람의 가슴에는 놀라움에 끌려가는 마음, 어린이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정거장이 있다.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에게서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고 있는 한 그대는 젊다.

생전의 김재순 전 의장은 주례를 1천번 이상 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동아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시인 강은교씨도 김 전 의장이 주례를 서주었다. 강씨는 샘터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 같은 시인인 임정남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경제적으로 결혼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지만 김 전 의장이 방을 구해주는 등 적극 나서는 바람에 결혼식을 앞당겼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내가 주례를 선 부부는 나중에 아들 낳고 잘 살아서 김재순이가 주례 서면 아들 낳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는 말도 했다. 그가 처음 주례를 선 나이는 35세였다. 이후 하도 주례가 많이 들어와 아예 몇 가지 주례사를 준비해놓았다.
“신부에게는 영국의 예를 소개한다. 영어에 ‘와이프’란 말이 생기기 전 영국에서는 아내를 ‘피스 위버’(Peace Weaver)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평화를 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부가 있음으로 해서 집안의 분위기가 따스하고 화목해진다. 바로 그런 여인이 되기를 부탁한다.”
“신랑에게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집보내는 것을 딸을 여읜다고 한다. 딸을 영영 여읜다는 것은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신랑만 믿고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이다. 신랑은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자기만을 믿고 이 자리에 선 신부에게 하느님과 친지, 증인 앞에서 한 거룩한 약속을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김재순 전 의장이 타계하기 수개월 전, 필자는 김 전 의장의 아들 김성구 ‘샘터’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김 전 의장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필자는 김성구 대표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다. 김 대표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웬만하면 오 선배의 요청을 들어주어야겠지만 아버님이 편찮아서 이번만은 힘드네요,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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