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년간 별궁으로 사용… 고종 때 황궁으로 승격
270년간 별궁으로 사용… 고종 때 황궁으로 승격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7.29 13:37
  • 호수 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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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궁궐을 가다 <2> 덕수궁
▲ 덕수궁은 고종 황제가 가장 사랑했던 궁으로 270년간 별궁으로 사용되다 대한제국 때 왕궁으로 승격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앞에서 궁을 관람하는 사람들.

고종, 황제직 물려준 뒤 거주… 장수 비는 뜻으로 ‘덕수궁’이라 불러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쓰인 석조전 인상적

경복궁 내 건청궁(본지 526호 참조)에서 벌어진 을미사변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아관’이라 불렸던 옛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그는 일본에 들키지 않기 위해 ‘경운궁’과 옛 러시아공사관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110m의 길을 조심스럽게 걸었고 훗날 이 길은 ‘왕의 길’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은 다시 이 왕의 길을 통해 경운궁으로 돌아와 이곳을 황궁으로 삼고 중건에 들어간다. 4대궁의 막내 격인 ‘덕수궁’(德壽宮)은 이렇게 탄생했다.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평화로운 이름과는 달리 덕수궁 역시 경복궁 못지않은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적 제124호인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앞서 밝혔듯이 경운궁이었다. 이곳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강씨의 무덤(정릉)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현재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저택이 들어섰다.
궁의 지위를 얻은 건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는 왕궁이 모두 불타자 1593년부터 저택을 행궁(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르는 별궁)으로 중건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이름을 경운궁이라 고쳐 7년간 잠시 왕궁의 지위를 얻는다. 이도 잠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다시 270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됐다.
1907년 순종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준 고종은 황궁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후에도 이곳에 거처했는데, 이때부터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 중화전의 야경.

지난 7월 26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를 나오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방문객을 맞았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남향하고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지만 1904년에 일어난 화재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이런 사실보다 더 유명한 건 이곳에서 진행되는 왕궁수문장 교대식이다. 이날은 무더위로 인해 진행됐지 않았지만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30분 등 하루 세 차례(혹서기‧혹한기 제외) 절도 있는 자세로 진행되는 수문장 교대식은 매년 100만명의 관람객을 모을 만큼 인기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정문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이동하면 중화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건물은 2단으로 조성된 월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건물이지만 역시 화재로 규모가 줄어 현재와 같은 단층이 됐다. 정전에 들어서면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작은 집 모형)에 새겨진 용을 한 쌍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장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상징한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석조전과 석조전의 별관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동쪽에는 함녕전이 위치해 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했던 곳이다. 1909년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 마지막에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이오니아 양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이 특징인 로코코풍으로 꾸몄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됐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물 제820호로 지정된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건물로 당시 그가 사용하던 가구, 서화, 집기 등을 배치해 100여년 전 궁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함녕전은 ‘ㄴ’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몸채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규모로 지어졌다. 몸채 평면은 경복궁의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또 그 옆으로는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를 두었다. 건물 뒤편으로는 경복궁 아미산처럼 굴뚝이 자리하고 있다.
황실도서관이었던 중명전은 현재는 궐밖에 위치해 있다. 서문인 포덕문 너머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서양식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1905년 일제의 강압 속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자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중명전은 8월 1일부터 올 연말까지 노후화된 내부 전시물 리모델링과 조경 정비를 위해 임시 폐쇄된다.
현재 덕수궁은 타 궁과 달리 상시 야간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은 오후 8시 마감되며,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 석조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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