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백년을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교수님, 백년을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8.05 11:23
  • 호수 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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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란 제목의 책이 나왔다. 올해 96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8월 1일 펴낸 에세이집이다. 제목에서 우선 큰 감동을 받는다. 아무나 정할 수 없는 제목이다. 만남과 이별, 좌절과 승리가 반복된 1세기를 걸어온 사람에게만 가능한 제목이다. 100년간 발효된 정신세계, 100세 가까이 살아온 시간 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교훈이 농축됐을 것이다. 외경심과 함께 호기심을 갖고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 제목은 직접 지은 건가요?
“출판사(덴스토리)에서 논의한 결과를 저에게 알려왔어요. 저도 괜찮다고 했어요.”
-교수님이 생각한 제목은 무언가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같은 제목이었어요.”
-책 제목처럼 실제로 백년을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인생은 지혜롭게 성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처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아주 없다는 것과는 다른 거지요. 무엇인가 만지고 가는 게 인생입니다. 끝까지 책임 있고 그 책임에서 행복해야 하지요.”

세속적․단초적인 답변을 구하려고 조급해 하는 기자와 백세를 눈앞에 둔 철학자와 우문현답의 엇박자가 계속될 것 같아 더 이상 유사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장(章)을 보라”고 대답해주었다. 거기엔 이런 말들이 씌어 있었다.
“공자․석가․예수 때로는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나 석가는 존경 받는 스승이기는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범죄자의 낙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살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고 스승이 되었다. 그분들은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다가 간 분들이다. 큰 업적을 남긴 바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사랑받고 감사의 대상이 되는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뜻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 뻗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인간애의 주인공들이었다.(중략)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을 숭앙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분들과 같은 삶을 이어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우리는 예술이나 학문의 업적은 남길 수 없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는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인 것이다. 그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그 사람이 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랑은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기자는 1년 전 김형석 교수를 인터뷰했다(‘백세시대’ 457호 인물 포커스). 김남조(89) 시인이 “아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대단한 분이 계신데 백세시대가 그런 분을 인터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다. 당시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도 김 교수는 지치는 기색이 안보였다. 인터뷰가 끝난 뒤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어서 함께 버스를 탔다. 김 교수가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꼿꼿한 자세로 천천히 걸음을 떼는 뒷모습은 쓸쓸한 초로의 신사였다.
‘백년을 살아보니’란 책을 읽는 동안 김 교수의 그날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뇌출혈로 쓰러져 20여년 꼼짝 못한 채 누워있던 아내를 10여년 전 떠나보내고 텅 빈 이층집에서 혼자 식사준비하고 글 쓰고 외출하는 노교수의 모습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외손녀 사위인 문유석 판사가 쓴 아래의 글이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멍해지기도 했다.
부인을 떠나보내고 자식들에게 부담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혼자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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