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왜 지혜와 경험의 보고인지 알게 되더라
노인이 왜 지혜와 경험의 보고인지 알게 되더라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10.14 14:19
  • 호수 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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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노인-오랜 경험, 깊은 지혜’ 전
▲ 이번 전시는 유명 예술가가 아닌 농부, 시계수리공, 양복재단사 등 각자 위치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어르신들의 지혜와 경험이 담긴 자료를 소개하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사진은 농부로 살아오면서 방 두 칸 분량의 메모를 남긴 임대규 어르신의 농사일기.

농부‧시계수리공‧양복재단사로 살아온 온 어르신들의 발자취 소개
59년간 꼼꼼히 기록한 농사일기, 100년 넘게 사용한 망치 등 인상적

2014년 개봉한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기억보유’라는 독특한 소재를 선보였다. 완벽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의 기억을 삭제하고 단 한명에게만 그 사회의 기억을 보유하게 한 설정과 새로운 기억보유자에게 이를 전달하면서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과정을 통해 노인이 가진 경험과 지혜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 작품의 주제처럼 최근 평범한 노인 누구라도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려 화제를 모으고 있다. ‘노인의 날’을 기념해 오는 11월 8일까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노인(老人)-오랜 경험, 깊은 지혜’ 특별전에서는 열정과 사명감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어르신들이 쓰던 도구 60여점과 인터뷰 영상, 노인이 제작한 노인 주제 영화 7편을 통해 노인의 참된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유명 예술가가 아닌 농부 임대규(82) 어르신, 시계수리공 오태준(82) 어르신, 양복재단사 이경주(72) 어르신, 대장장이 박경원(79) 어르신 등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평생 농사를 지었던 임대규 어르신은 59년간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공책과 달력에 꼼꼼히 적어 방 두 칸에 보관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이 방대한 자료 중 농사와 가정의 대소사, 올림픽 등 국가의 중요행사를 기록한 ‘4292년(1959) 농사일기’, ‘88 서울 올림픽 기록 달력’, 그리고 인터뷰 영상 등을 소개한다.
임 어르신은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매일 깨알같이 적었다. 처음에는 작은 노트에, 이후에는 큼직한 달력에 그날그날의 일을 옮겨 적었다. “기록은 모두 역사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고 한다.
글과 그림이 있는 영농일기는 기본이고 아들과 딸이 준 용돈과 선물도 빼곡하게 적었다. 혹시 나중에 배탈이 나면 연락을 하기 위해 여행지에서 들른 식당의 명함도 차곡차곡 모았다. 명함이 없으면 전화번호가 적힌 음식점 나무젓가락 포장지를 챙겼다.
기록의 힘은 대단했다. 재판의 증거자료로도 채택된 것. 2006년 6월 7일자 달력에 임씨는 ‘배추장사(가) 작업해놓고 못 가지고 간다고 했음. 시세가 없어서였음’이라고 적었다. 이웃집 농부가 키운 배추를 사기로 한 중간도매상이 시세가 떨어지자 원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소송이 벌어졌는데 임 어르신의 메모가 승소의 결정적 증거로 활용됐다. 그날을 기억하려는 듯 임 어르신은 달력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 60년간 망치질을 한 박경원 어르신이 사용하는 도구.

임 어르신의 방대한 자료도 놀랍지만 각자 자리에서 장인이 된 세 어르신이 남긴 ‘몸의 기록’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망치는 내 나이보다 많아요. 내 나이가 80살인데 이것은 100년이 넘었을 거예요. 우리 아버님이 쓰시던 것. 그래서 이게 우리 집 가보예요.”
영상 속 오태준 어르신의 인터뷰처럼 함께 전시된 그의 도구에는 평생 시계수리공으로 살아온 그의 장인정신이 묻어 있다. 망치를 비롯해 줏대, 드라이버 등 평생 그의 동반자가 된 수리도구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에 버금가는 위대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가업과 기술을 물려받아 재단사로 평생을 살아온 이경주 어르신의 고백도 감동적이다. “옷을 다 만들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 꼭 시험보고 점수를 기다리는 것 같지 뭐야”라고 말하는 그의 고백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대나무 곡자가 자꾸 갈라져서 쇠로 된 것을 사서 쓴다”는 말에서는 장인정신도 엿볼 수 있다.
“기술이라는 건 끝이 없어. 60년도 더 했는데 아직도 나는 완성되지 않았지.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게 많아.”
대장장이 박경원 어르신의 말에서는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 이번 전시에서는 지하철 택배원 조용문(77)어르신을 객원큐레이터(공동)로 초빙, 전시 기획에서 진행에 이르기까지 노인의 생각을 반영했다. 사진과 영상 일부도 노인이 촬영·편집한 자료를 사용했다. 전시장 영상실에서는 노인이 찍은 영화가 상영돼 특히 눈길을 끈다.
박종익(65) 씨의 2013 서울노인영화제 우수상 수상작 ‘어머니! 오야!’, 변영희(69) 씨의 2014 서울노인영화제 대상 수상작 ‘우리집 진돌이’ 등 노인의 시선으로 일상을 다룬 작품에서 노인 문제에 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노인으로 구성된 사회적 기업 ‘은빛둥지’의 사연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노인들의 계획’에 등장하는 노인의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었더라고요”라는 말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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