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찾은 곳이 영화관…‘실락원’은 두 사람의 혼을 송두리째 뽑을 지경이었다
결국 찾은 곳이 영화관…‘실락원’은 두 사람의 혼을 송두리째 뽑을 지경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6.10.28 13:29
  • 호수 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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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8>

“탐정인가 뒤를 쫓게.”
“달래서 데려오라는 분부이니.”
“언제까지 종 노릇할 작정인구.”
“……종노릇이랬다.”
종이란 말이 사실 단주의 가슴속을 따끔하게 후볐다. 주택지대를 벗어나서 큰 거리에 나왔을 때 미란의 꽁무니를 잡은 것이나 노기가 풀리지 않은 마음에 미란의 태도는 쌀쌀하다.
“왜 어른들한테 매여만 지내란 법인가. 우리에겐 우리의 차지가 있겠지.”
“지금 종노릇밖엔 할게 더 무어게.”
“종노릇 하는 동안 온전한 사람구실 하나 보지.”
“그럼 어떻거면 모면한단 말요. 어떻게 하면——”
결국 한 전차를 타고 시가로 들어와서는 약속이나 한 듯 말없는 동안에 백화점 앞에서 또 같이 내려 버렸다. 미란은 조금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단주는 ‘종’이란 말을 반성하면서 승강기를 타고 사층 식당에 이른 것도 역시 말없는 속에서였다. 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저녁을 시키고 났을 때 미란은 비로소 미소를 띠이면서 단주에게 한마디 올가미를 지워 본다.
“어디 재주가 있거든 날 붙들어서 데려가지. 그렇게 소락소락 끌려가나 보게. 제아무리 장한 게 와두 내 맘을 휘지는 못할걸.”
창밖으로는 바로 눈 아래로 거리와 맞은편에 강이 내려다보인다. 강 건너로는 벌판이 깔렸고 섬 속에는 수목이 우거졌다. 황혼 속에 저물어가는 느릿한 강산을 바라보던 단주는 문득 강 건너 먼 산 위로 먹같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듯 시선을 사방으로 휘두를 때 온 누리가 어느 결엔지 컴컴한 그림자 속으로 휩싸여 들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순식간에 강산이 묵화 속에 있는 듯 흐렸고 거리 위 허공 또한 괴괴하게 어두워 간다.
“비가 오려나.”
중얼거려 볼 때 역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미란도 같은 느낌 속에서 한가지의 발견을 하고 단주의 주의를 끌었다.
“저 만수대 쪽을 봐요. 측우소에 기가 올랐죠.”
강 왼편으로 한 킬로쯤 떨어진 언덕 위를 더듬으면서 단주는 측후소 지붕 위에 팔딱거리는 조그만 깃폭을 아련히 알아맞힌다.
“확실히 붉은 기지.”
“폭풍경보예요.”
“별안간 날씨가 사나워졌나.”
“소낙비나 오려구.”
“차라리 한바탕 쏟아졌으면——”
막연한 기대와 불안 속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미란은 한잔 커피에도 도무지 구미가 돌지 않는다. 식사를 마쳤을 때까지도 흐린 천지는 무죽거릴 뿐이지 빗방울 떴는 기색조차 없다. 한결같이 무거운 공기가 용기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달리는 마음을 속박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할까.”
산속으로 원족을 나온 어린 학생이 어느 길을 취할지 몰라서 망설이는——그런 그들의 눈동자다. 아직 비도 안 오는데 부랴부랴 교외 집으로 돌아갈 것은 없고 그렇다고 그 외 또 갈 곳이 어디인가——하는 그들의 태도이다.
저녁 등불이 와서 식당 안이 환해지고 음악소리가 들려올 때 단주는 한 가지 계시나 받은 듯 눈망울을 빛냈다.
“나두 실상 종노릇은 싫어. 오늘두 미란을 붙들어 가려는 것이 내 본의는 아니거든. ——그까짓 한번 심술을 피우고 혼들을 뽑아 볼까.”
“누가 아니래.”
“나만 따라와요.”
용감한 병사같이 앞잡이를 서서 결국 찾은 곳이 영화관이었다. 명화의 밤이란 굉장한 선전에 눈을 흘리운 것이나 사실 고전영화 「실락원」의 한 편은 두 사람의 혼을 송두리째 뽑을 지경이었다. 검소하면서도 찬란한 화면이 폭 좁은 막 위에 꽉 차면서 어두운 홀 안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낙원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생활——각각 월계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운 그들의 자태가 해면같이 시선을 빨아들여 미란은 정신없이 몸을 앞으로 쏠리우다가도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에 문득 자세를 바로잡으며 어두운 주위를 휘둘러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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