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이 아니고 까마잡잡하게 자라나는 풋수염을 보면서 현마는 문득…
솜털이 아니고 까마잡잡하게 자라나는 풋수염을 보면서 현마는 문득…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6.12.02 13:51
  • 호수 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13>

헐하게 믿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미묘한 처녀의 마음인 것이요, 믿지 않기에는 너무도 가엾은 어제까지의 순진하던 동생인 것이다. 흑인지 백인지 하룻밤 사이의 변화조차도 알 수 없는 미묘한 자연의 조화를 세란은 야속히 여기면서 머리 속이 혼란해만 간다.
부엌에서는 사과 삶는 냄새가 흘러오며 사과밀이 거의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세란은 유난스럽게 사과밀을 즐겨해서 옥녀의 알뜰한 솜씨로 삐는 때가 없었다. 유리접시에 담긴 식은 사과밀이 차와 함께 방에 날라 왔을 때 세란은 장난의 심사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꾀를 생각해 낸다. 미란의 접시에 초를 두어 방울 쳐서는 탁자 위에 살며시 올려놓은 것이다. 요량으로는 미란의 신경을 시험하자는 것이었다. 어리석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오늘의 자기의 마음은 자기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세란이었다.
목욕실에서 나온 미란은 식탁 앞에 주저앉자 목이 마른 김에 익은 사과 조각을 한입 넓적 물었다가 금시에 낯을 찡그리며,
“무슨 놈의 사과밀이 이 모양이야. 돌배두 아니구.”
접시 위에 게우며 들었던 포크를 던져버린다.
“옥녀야. 너 이러기냐.”
죽을 것이 옥녀이나 그러나 옥녀가 달려오기 전에 세란이 가로채어서,
“사과 맛이 원래 단 것이라더냐. 이가 곱고 눈이 감겨질수록 좋은 것이지.”
“언니 장난이구먼.”
화를 내면서 경대 앞에 다가앉으며 화장병을 함부로 손찌검한다. 거울에 비취인 얼굴이 계란의 덕으로 종이같이 팽팽하고 윤택이 흐르기는 했으나 석류알같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때 세기영화사 사무실에서도 현마는 세란과 거의 같은 역할을 단주에게 대해서 하고 있었다. 책상 맞은편 단주를 바라보면서 현마는 문초나 하는 듯이 엄하다가도 목소리가 금시 부드러워지곤 한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데려오란 것이지 같이 영화구경을 하구 아파트에서 밤을 지내랬나.”
“비 삠을 하러 간 것이죠.”
“폭풍우의 밤이란 일상 위험한 것이거든.”
“무사했으면 그만이죠.”
“무섭지들 않았단 말이야.”
“무섭기에 가만히들만 있었죠. 심호흡을 해봐두 위스키를 먹어봐두 손바닥에 땀이 나면서 몸이 덜덜 떨리는걸요. 도랑을 잘못 건너뛰다가 언덕을 채 디디지 못하고 종아리를 상하구 물에나 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슴을 누르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어야죠. 밤새도록 잠 한숨 오지 않구……”
비유 속에서 거짓 없는 진실을 들을 수는 있었으나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도 몇 치씩을 자라는 소년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믿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현마에게는 생각되었다.
“요새 아이들은 숙성하고 엉큼해서 속을 좀체 알 수가 있어야지.”
솜털이 아니고 까마잡잡하게 자라나는 풋수염을 단주의 코 아래에 보면서 현마는 신기한 생각이 들며 볼 동안에 자라가는 것이 문득 두려워도 진다. 어느결엔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는 어른의 악덕을 배우고 우주의 비밀을 샅샅이 알고야마는 그 인생의 생장의 법칙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 어느 특출한 한 사람만이 장구히 그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요, 차례차례로 대를 이어가고 꼬리를 물어가는 그 자연의 법칙에 현마는 오늘 알 수 없는 일종의 질투조차 느끼게 되었다. 단주들이 자기의 세상을 뺏고 들어앉게 될 때 자기는 벌써 그 자유롭던 세상을 하직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그 운명적인 신세를 깨달음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질투인 것일까. 도랑을 사이에 두고 겁만 먹고 손에 땀을 흘렸다고는 하는 도랑을 건너뛰는 것은 순간의 서술이다. 약차하면 숙성한 단주가 그날 밤을 경계로 감쪽같이 국경선을 넘어 이미 이 나라에 한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아닐까——하는 의혹이 그 두려움과 질투 속에서 여전히 솟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