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은 현마가 데리고 나가고, 세란 혼자만의 집을 단주가 지키기로…
미란은 현마가 데리고 나가고, 세란 혼자만의 집을 단주가 지키기로…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6.12.30 10:51
  • 호수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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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17>

인생의 문을 열 계획을 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오해 버린 두 사람은 일단 반역하고 나온 집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그 일건을 실마디로 이상한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흥분되어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을 식히고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당분간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서 서로 멀리하고 접촉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 현마와 세란 부부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맞갖지 않아서 짓부득이 트집을 쓰는 두 사람이 그렇게 수월하게 언니들의 계획에 좇을 리는 만무하므로 피차의 마음이나 가라앉거든 가까운 장래에 결혼을 승낙해 주겠다는 약속을 미끼삼아 달래는 것이었으나 어떻든 두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설복시켜서 자기들의 뜻에 좋게 했을 때 공교롭게도 현마의 동경행의 일건이 생긴 것이다. 새로이 봉절할 영화의 교섭의 용무가 일어난 까닭으로 현마의 여행이 긴급히 필요해진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미란들에게 대한 계책과도 일치되어서 두 사람을 당분간 가르기에는 마침 한 기회라는 것이 현마와 세란의 의견이었다. 미란의 마음이 더욱 달뜬 것 같으니 바람을 쏘여 주고 구경도 시킬 겸 현마가 맡아서 데리고 떠나고 남은 세란 혼자만의 집을 지켜주고 동무를 해줄 겸 단주는 아파트를 비우고 교외의 집으로 나와 있게 하자는 것이 또한 부부의 선후 없는 똑같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전날 비행장에서 가까운 기회에 소풍을 시켜주리라고 달랜 미란을 현마가 휴대하게 된 것은 거리낄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거니와 여자들만 남게 된 빈집을 사내붙이인 단주가 세란의 동무를 해서 지켜주게 된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부부도 물론 그닷한 생각과 주저가 없이 그것을 의론하고 결정한 것은 거의 그 당장의 일이었다. 단주와 미란 두 사람의 편으로 보면 어른들의 작정하는 일이니 좋고 싫고가 없이 그대로 좇아야 하는 것이요 당초에 계획했던 반역도 수포로 돌아가고 또다시 어른들의 굴레 속에 매이게 되는 것이었으나——이번에는 야릇하게도 그 어른들의 굴레 속에서 각각 인생의 걸음을 재촉하고 주름잡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찌뿌득하던 미란도 막상 가벼운 행장을 차리고 나섰을 때에는 처음으로 긴 여행을 하게 되는 기쁨으로 유쾌하게 덜렁거리게 되었다.
“그렇게 차리구 둘이 나선 건 똑 무엇 같을까.”
세란의 웃음을 받아 가지고,
“무엇 같긴 무엇 같아요. 아저씨와 동생 같지.”
“아저씨와 조카딸은 아니구. ——얘기 속에 흔히 있는.”
“망칙해라. 조카딸은 왜 조카딸예요. 그렇게 층이 저뵈나요.”
“무난하게 사장과 비서라구 해두지. 다른 사람이 봐두 숭허물없게.”
현마의 판단을 조롱하는 듯 세란은 미란을 바라보며,
“얘 비서같이 성가신 자리는 없다더라. 사장의 비위를 늘 맞춰야 하구 마음을 주면서두 속으론 쉴새없이 경계해야 하구.”
결국 그 자리는 모두들 허물없는 웃음으로 돌리고 한 대의 자동차에 두 사람 두 사람씩 네 사람이 앉아서는 현마들을 보내려 비행장으로 향할 때 네 사람의 마음은 다 각각 제 계획에 즐거웠다. 세란의 옆에 앉은 단주며 현마의 옆에 앉은 미란이며가 지난날의 안타까운 감정은 어느결엔지 청산해 버린 듯 이제는 벌써 새 옷들을 입고 어른들의 손에 끌려 구경을 떠나는 아이들같이 개운하고 심드렁해 보였다. 참으로 아이들답게 금시 주의의 목표가 변하고 관심의 방향이 변해 버리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행장에 다다라 날아날 준비를 하고 섰는 여객기 앞에 이르렀을 때 미란은 문득 전날의 생각이 나면서도 그때의 알 수 없던 불안과 공포와는 다른 일종의 든든한 마음이 솟았다. 동방비행의 발명이 그때에는 한없이 천재적이고 기발하고 두려운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이제 아저씨와 함께 그 앞에 섰으려니 날개를 푸득이는 그 위대한 붕새도 가장 익숙하고 범상하고 친밀한 것으로 보이면서 그때에 모욕을 받고 낙오를 당한 것쯤은 별반 분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단주와 모험을 꾀했을 때 이상으로 오늘의 매력을 가져옴은 사실이었다. 현마의 뒤를 따라 날개를 밟고 새 가슴속에 몸을 간직했을 때에는 전날의 패배의 슬픈 기억은커녕 새로운 용기와 흥분이 솟으면서 전신의 피가 신선하게 수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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