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세 현역 디스크자키’ 최동욱 “추억의 팝송은 노인을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줘요”
‘81세 현역 디스크자키’ 최동욱 “추억의 팝송은 노인을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줘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3.10 13:21
  • 호수 5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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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디스크자키… 인기 음악프로 ‘3시의 다이얼’ 8년 간 생방송
2005년부터 인터넷 라디오방송 진행, 동창회 등 대상 ‘팝 콘서트’도

대한민국의 노인 대부분은 1960 ~70년대 라디오 음악프로 ‘3시의 다이얼’ 테마 뮤직 ‘행복한 그 기분(That Happy Feeling)’이란 곡을 기억한다. 이 음악과 함께 굵직하면서 명쾌한 음성도 함께 떠올린다. 한국 최초의 디스크자키(DJ) 최동욱(81)씨.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엔 방송국이 아닌 아담한 카페에서다.
그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기를 좋아했다. 팝송 프로와 ‘가요 탑 10’ 프로를 처음 진행했고, 국내 최초로 자동차 운전요령, 드라이브코스 등 자동차 관련 서적을 펴냈다. 매주 일요일 3시~5시 30분,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에서 음악을 들려주는 그를 만나 ‘노인과 팝송’을 얘기했다.

-어떻게 이곳에서 디제이를 하게 됐나.
“이곳은 뜻 있는 이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만든 문화공간입니다. 평소에 교사‧ 교장, 위관급 군인, 고위직 공무원 출신들이 모여 음악을 들으며 쉴만한 품위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돼 4개월 전부터 중‧장년층에게 요즘 듣기 어려운 음악들을 감상할 기회를 드리고 있어요.”
-‘3시의 다이얼’…과거로 회귀한 듯하다.
“최동욱하면 역시 ‘3시의 다이얼’이지 않느냐고 해서 붙이게 됐어요. 동아방송 개국 직후인 1964년부터 71년까지 생방송으로 진행했고 전국 라디오 청취율 1위(문공부 조사) 자리를 지켰었지요.”
-다시 시작하니 기분이 어떤가.
“그때나 지금이나 기분은 그대로예요.”
-생방송이 없던 시절이었다고.
“당시엔 오후 2시~5시에 라디오 방송을 하지 않았어요. 그 시간을 메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재방송이지만 저희는 그러지를 않았어요. 전화와 엽서를 받아 생방송으로 음악을 들려주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대부분의 프로가 토‧일요일은 녹음으로 내보냅니다. 저는 청취자들이 쉬는 동안 즐거움을 선사하는 게 방송인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주중에는 물론 토‧일요일도 생방송으로 진행했어요. 그래서 더욱 청취자로부터 사랑을 받기도 했고요.”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전화가 있는 집이 드물었던 시대였어요. 전화가 없는 청취자들로부터 ‘특권층을 위한 프로냐’는 원망의 소리도 들었어요. 또, 특정시간대에 전화가 폭주해 광화문의 전화국 릴레이가 타버려 담당 국장이 방송국을 찾아와 전화 좀 적게 오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

최동욱씨는 하루에 세 개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오전에 팝송 순위를 소개하는 ‘탑 튠 쇼’를, 오후에 ‘3시의 다이얼’, 밤 12시에 ‘0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다. 지금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아류 프로들이 많이 나왔다.
“타 방송국에서 이름도 비슷하게 ‘탑 튠 퍼레이드’라고 짓고 방송했지만 흉내 내는데 불과했어요. 진정한 디스크자키는 제 대에 명맥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어요.”
-진정한 디제이는 무얼 말하나.
“디제이는 곡을 선정하고 레코드 판을 걸고 소개‧해설도 직접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곡도 다른 사람이골라주고 직접 판도 걸지 않고 스크립터가 써준 걸 읽지요.”
-이종환‧박원웅‧김광한‧배철수 등은 진정한 디제이라고 볼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그렇지요.”
-팝송 신곡들 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개인적으로 발품을 많이 팔았어요. 미군부대 내 ‘사병클럽’에 들어가는 음반을 지인을 통해 빌리기도 하고, AFKN의 미군용 음반을 빌리거나 여분을 얻어다가 쓰기도 했습니다.”
-팝송 ‘백판’이 유행이었다.
“군사정권의 유물 중 하나였지요. 5‧16 혁명 직후 외래음반판매가 금지됐어요. 종로와 청계천 주변의 레코드판 영세업자들이 원판을 구해다가 복제판을 마구잡이로 찍어냈지요.”
-이곳엔 어떤 이들이 찾아오나.
“주로 50~60대가 알음으로 찾아오고 70대도 옵니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팝송을 신청해 듣기도 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울컥해 하는 분들도 계세요.”
-팝송이 노인들에게 힐링이 될 것 같다.
“음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저는 음악을 소개할 때 꼭 수치를 말해요. 가령 가수 ‘냇킹 콜’의 노래가 1951년에 나와 6주 동안 넘버원을 했다는 식으로 소개합니다. 듣는 이들은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아, 맞아’하고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런 과정이 뇌의 활성화에 도움을 줍니다. 건강에 직결되는 보약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가 개인적으로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어요.”

최동욱씨는 “팝 역사상 가장 좋은 음악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던 1950년~1970년대 ‘파퓰러뮤직 골든에러’(대중음악황금시대)에 일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려대 국문학과,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 음악을 가까이 했다. 클래식합창단을 만들기도 했고 미국 대사관 공보실에서 LP판을 빌려 듣기도 했다. 1959년 종로의 뮤직홀 ‘디쉐네’에서 디제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동아방송에 특별 채용됐다. 동양방송으로 자리를 옮겨 ‘최동욱쇼’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을 맡았다. 방송국을 나와 잠시 서울신문‧동아일보 등에 자동차칼럼을 연재했다.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LA 미주한인방송 ‘라디오서울’에서 디제이를 했다. 2005년 귀국해 지상파 수준의 인터넷 라디오 ‘라디오 서울코리아’(www.RadioSeoulKorea.com)를 설립해 현재까지 매일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그의 아들(최성원‧53)도 부산 교통방송에서 디제이로 활동 중이다.

-가요프로까지 진행했다고.
“그 전까지 가요 순위를 발표하는 프로가 없었어요. 새로 발매되는 음반을 소개하고 일주일동안 청취자들의 신청엽서를 모은 결과를 토대로 순위를 발표했어요. 가수들에겐 무척 중요한 프로일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화장실을 가면 두세 명이 따라붙어 잘 봐달라는 의미로 제 호주머니에 (봉투를)쿡 찔러놓고 가기도 했어요(웃음).”
-어떤 가수들이 1위를 했나.
“첫 프로에 가수 최양숙이 부른 ‘황혼의 엘레지’가 1위를 했어요. 김치캣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란 노래도 기억이 납니다. 작곡가 박춘석이 ‘금호동’이란 신인 가수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던 일도 있고요.”
-디제이와 자동차 칼럼니스트는 서로 연상이 잘 안 된다.
“1960년대 중반, 방송국에서 가장 먼저 자가용을 가지면서 차에 대한 경험들이 누적됐어요. 미국‧일본 등의 자동차 서적을 참고로 해 자동차 운전 요령, 고장 시 긴급조치 등에 대해 썼습니다.”
-드라이브코스는 또 뭔가.
“제 경험이 바탕이 된 겁니다. 서울에서 춘천을 가려는데 어떤 길로 가야하나 헷갈리는 겁니다. 남한산성을 시작으로 해 전국을 차로 누볐어요. 나중에 나남출판사를 통해 ‘환상의 드라이브코스’ 5권을 펴냈어요. 그 책 완성하는데 차 두 대가 들어갔습니다.”
-요즘도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한다고.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골프 같은 거 하지 않고 CD, 음악 관련 책들을 사 모으고 스튜디오를 꾸릴 만한 방송 장비들을 구입했어요. 모 방송국의 CD 30만장 보다 제가 가진 10만장이 더 알찹니다. 어떤 곡이든 2~3초 만에 들려줄 수 있어요. 2005년부터 서울 삼성동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인터넷을 통해 오전 8시~12시에 생방송을 하고 오후 시간에 그 프로를 4번 돌립니다.”
-비용이 수월찮게 들 텐데.
“양질의 음질을 확보하기 위한 전용회선(31만원)에다가 서버호스팅(15만원), 전기료 등 한 달에 150만원 가량 들어가요. 제 방송 열심히 들어주신 분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청취자들에게 제대로 된 방송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최동욱씨는 학교 동창회, 교장단,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팝 콘서트’도 해오고 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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