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예수정’과 대기만성
배우 ‘예수정’과 대기만성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4.07 13:49
  • 호수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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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이 만발해 전국 곳곳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벚꽃 명소 곳곳을 방문해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벚나무마다 개화 속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양지에 있는 벚나무는 빨리 만개하는 반면 음지의 벚나무는 주변 벚꽃이 다 지고 나서야 만개한다. 유독 개화가 뒤처지는 벚나무를 보면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라도 성공한다는 말이다.
최근 이해랑연극상에 27번째 주인공이 가려졌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부산행’에서 안타깝게 좀비로 변한 착한 할머니 역을 맡았던 예수정(62)에게 돌아갔다.
MBC ‘전원일기’에 출연하며 ‘국민 할머니’로 통했던 정애란(1927 ~2005)의 딸이기도 한 예수정은 연기 경력이 40여년에 달하지만 경력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1979년 한태숙 연출의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뒤 ‘밤으로의 긴 여로’, ‘19 그리고 80’, ‘벚꽃 동산’, ‘과부들’, ‘하나코’ 등에 출연하며 연극 무대에선 인정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부산행이 히트하고 최근 종영한 SBS ‘피고인’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그의 연기도 빛을 보게 됐다.
예수정은 수상소감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로 긴 무명생활을 꼽았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연기력을 쌓는데 보냈다는 것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이면서도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음에도 연기를 포기 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정년이 없다. 보통 직장인들이 연차가 쌓일수록 높은 직급에 올라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은퇴를 하지만 배우는 좀 다르다. 데뷔 후 30대를 전후로 주연배우로 최고 정점에 올랐다가 조연으로, 단역으로 서서히 밀리면서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늦은 나이에 중심에 서는 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0년대 들면서 ‘주연은 젊은 배우’라는 공식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순재처럼 80대가 넘어서도 극을 이끄는 핵심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명의 60대 배우가 주연급으로 성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정도 연극 무대가 아닌 곳에서는 감초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변하는 중이다. 더 많은 ‘예수정’이 등장해 실력으로 젊은 배우들을 제치고 전면에 설 것으로 기대한다. 꽃망울을 터트리지 못하고 지는 꽃도 많다. 빨라도 늦어도 피기만 하면 화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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