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황손’ 이 석 황실문화재단 총재
‘대한 황손’ 이 석 황실문화재단 총재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6.02 13:55
  • 호수 5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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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아야 해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어요”

고종황제 친손자이자 의친왕 아들… 월남파병, 가수생활 등 부침 많은 삶
전주 한옥마을 내 ‘승광재’에서 역사 강연 “민족 정체성 모르면 미래 없어”

“노인이 가난하고 대접을 못 받는 거 그들의 업보다.”
고종황제의 친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 이 석(76) 황실문화재단 총재는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공경을 받지 못하는 세태’에 대해 묻자 이렇게 일갈했다. 이 석 총재는 “후세들이 보고 배울 만한 것을 만들지 못하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지내오다가 늙어버렸다”며 “양심선언을 하고 일하며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 석 총재는 전주시가 한옥마을 내에 마련해준 승광재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승광재는 350평 공간에 전통한옥 네 채가 들어앉아 있다.
지난 5월 말, 승광재의 아담한 한옥. 노란색 저고리를 받쳐 입은 이 총재는 병풍을 배경으로 반듯하게 앉아 화사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승광재와 황실문화재단을 소개해 달라.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에서 ‘광’자와 뜻을 이어간다는 ‘승’자에서 따왔어요. 고종 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외국 사절부터 정치인, 관광객까지 많이 찾아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 이곳을 찾아 기를 받겠다며 이불을 덮고 잤어요. 김정숙 여사도 최근에 방문했고요.”
황실문화재단은 조선왕조 황실문화의 정체성을 되찾고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 석 황손이 총재로 있으며 전국에 50개 지부를 두었다.
-근황은.
“바쁘게 지냅니다. 국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전국 8도를 다니며 황실의 전통, 문화, 역사에 대해 강연을 합니다. 강연을 들은 분 중에는 ‘이렇게 찬란한 역사문화가 있는데 왜 이걸 모르고 지내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하세요.”
-황실을 원하는 국민도 있다.
“제가 핏줄로 엄연히 살아 있는데 그 역사를 쉽게 잊는다면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요. 5대궁이 존재하고 있고 황실을 마음에 그리는 국민도 많아요. 저는 일본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앞장서고 있어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 총재는 이어 “외국인이 오면 ‘웰컴 투 코리아’ 라고 반갑게 맞이하고 역사해설도 해주며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 석 총재는 1941년 조계사 건너편에 위치한 사동궁에서 태어나 성북동 성낙원(의친왕 별장)에서 상궁들의 보살핌을 받고 컸다. 창경초, 경동고,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를 졸업했다. 60년대 초 가수활동을 했다. ‘비둘기 집’ ‘두마음’ ‘외로운 조약돌’ 등의 히트곡이 있다. 월남에 파병됐다가 어깨에 파편을 맞고 송환됐다. 1979년 12.12 직후 ‘칠궁’에서 쫓겨나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10여년 만에 귀국해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두 딸을 두었다.

-의친왕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는 62세 때 창경궁 전화교환원이던 어머니(당시 19세)를 만나 저를 낳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함께 살았어요. 동전을 손가락으로 구부릴 정도로 힘이 센 분이셨어요.”
이 석 총재는 의친왕이 황족 대표로 ‘조선민족대동단’ 조직에 관여했고, 손병희 등에게 33인의 독립선언문 초안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으로 기억했다. 이 총재는 “독립운동은 황실에서 먼저 일어났다”며 “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단동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만약 그때 성공했더라면 (나라의 기둥이 있으니까)대한제국이 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황손’이라고 불리는데.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뭔가 그럴 듯한 호칭을 만들어 붙인 겁니다.”
고종 황제는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등 3남 1녀를 두었다. 순종에게는 자녀가 없다. 영친왕은 이방자 여사와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사망했다. 덕혜옹주는 딸 하나를 두었다. 의친왕은 13남 9녀를 두었다. 이 석 총재는 11번째이다. 이 석 총재는 “제 위로 형님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둘째형(이우)은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당했고 야스쿠니신사에 강제합사 돼 있다. 황실이 존재한다면 내가 왕위 계승 1순위”라고 말했다.
-어릴 적 기억이라면.
“상궁들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학교를 다녔어요. 어린상궁들은 저를 따라다니며 ‘뛰면 안 됩니다, 왕자마마’라고 항상 말했어요. 역대 왕들이 건강이 안 좋아 일찍 운명한 건 운동부족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가.
“해방 후 창덕궁 입구에 구황실사무총국이 생겼어요. 중3 때 한 달에 한 번씩 그곳을 찾아가 생활비를 타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렇게 무시를 하더라고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생활비가 지원됐다가 전두환 정권 때 끊겼어요.”

▲ 이 석 총재가 승광재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역사강연을 하고 있다.

1955년 의친왕이 임종하고 명동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 석 총재의 가족은 이후 어렵고 외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가족부양을 책임진 이 총재는 음악다방의 DJ나,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음성이 아주 좋다.
“비둘기부대로 월남에 갔다가 휴가차 들어와 취입한 곡이 ‘비둘기 집’이란 노래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수백번 불렀어요.”
-요즘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가요무대에서 초청을 했는데 마침 세월호 사고가 나자 없었던 일이 됐어요. 불러주면 나가서 부르고 싶어요.”
-가수는 왜 그만두었나.
“흑백 TV를 통해 제가 노래하는 걸 보신 순종 황제비인 윤대비마마가 불러서 갔더니 ‘나라가 망하니까 왕손이 광대가 됐다’고 땅을 치며 우시는 겁니다.”
-미국은 어떻게 가게 됐나.
“12‧12 직후 신군부가 헌병대를 동원해 우리를 ‘칠궁’에서 쫓아냈어요. 궁정동에 있는 칠궁(사적 149호)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장희빈 등 7인의 후궁 신위를 모신 곳이에요.”
-고생이 많았겠다.
“하루 16시간 잔디 깎고 고급주택 수영장 청소하고 그랬어요. 구멍가게 하면서 흑인들에게 13번이나 강도를 당했던 일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항상 공포심을 가져 협심증까지 생길 정도였어요.”
이 총재는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잠시 한국에 들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을 텐데.
“김준‧임희숙 등 동료가수들과 청담동의 재즈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여전히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9번을 자살하려고 했어요. 한번은 도봉산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 몸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더라고요.”

이 석 총재는 마지막으로 경복궁 대문에 머리를 부딪쳐 생을 마감하려 했으나 그의 얼굴을 알아본 한 주간지 기자의 만류로 자살을 포기했다. 그 기자는 ‘마지막 황손’이 찜질방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계기가 돼 전주와의 인연이 생겼고, 주재민 전 전주시 시의원, 김완주 전 전주시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련된 승광재에 들어오게 됐다.
-황실이 이 지경이 된 배경은.
“이승만 대통령이 황실을 없애고 황실 소유 땅 1억5500만평을 환수조치하고 왕손들 품위유지를 안 시켰어요. 황실자료를 보관하던 구황실사무총국이 어느 날 방화로 불에 타 없어져 버리고 대신 문화공보부가 생겼고 문화재청이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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