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는 흡사 세상에서 쫓겨난 홀아이같이 보여 측은한 생각이 솟아올랐다
단주는 흡사 세상에서 쫓겨난 홀아이같이 보여 측은한 생각이 솟아올랐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6.30 13:25
  • 호수 57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2>

고물상에서 진귀한 고물이나 찾아낸 듯 사다가 건 그 염소의 탈이 오늘 그의 연극의 반주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두 뿌리의 뿔을 세우고 좁은 턱 아래로 수염을 드리운 염소의 모양은 비극의 모양 그것이다. 희랍의 옛적 디오니소스의 제삿날 사람들이 염소 가죽들을 쓰고 노래를 불렀을 때 비극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고사를 알던 모르던 간에 단주는 염소탈을 사다 걸고 자기의 신세와 대조시켜서 비극을 가장한 셈이다. 그 바닷속같이 푸르고 고요한 방에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등장한 것이 미란이었던 것이다. 단주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고 아닌 것보다도 그가 그것을 꾸민 것이 중요한 것이요, 그 무대장치가 참으로 비극의 터가 되고 안 된 것보다도 미란에게 준 비극적 인상이 단주로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건 성공한 셈이었다.
짙은 옥색으로 아래위를 단장하고 나타난 미란은 시절의 물고기같이 기운찬 것이었으나 방 속에 들어오자 같은 빛 속에 잠겨지면서 금시 그 기운을 뺏겨 버렸다. 푸르고 침침한 방 안 공기에 놀라면서 그 속에 누운 희끄무레한 단주의 얼굴이 더없이 쓸쓸하고 가엾은 것으로 보였다. 음울한 공기 속에서는 단주는 흡사 세상에서 쫓겨난 홀아이같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고아같이 보이면서 전에 없던 측은한 생각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방이 왜 이렇게 푸르고 찰까.”
창을 모조리 닫아 버리고는 책상 앞에 앉더니,
“꽃까지 이렇게 퍼렇구.”
화병의 호국을 뽑아서 휴지통에 넣고 가지고 온 샐비어의 새빨간 묶음을 대신 꽂고는 책상 위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다. 잡지는 잡지대로 소설책은 소설책끼리 모아서 시렁에 세울 때 소설 속에서 뽑아 써 낸 노트의 한 구절이 문득 눈에 걸린다.
“――즐거운 사람들이여, 고요히 고요히 춤추라. 내 머리 아프고 내 가슴 쓰리나니――.”
그 장을 떼서 쪽쪽 찢으면서,
“이런 슬픈 구절만 명심하니 병이 나을 리 있나.”
혼자 서두르며 독백을 계속하는 동안에 방안은 점점 어두워 가고 푸른 빛 속에 단주의 얼굴이 해쓱하게 솟기 시작한다. 몇 달 전에 첫사랑을 속삭이고 신변의 구속을 피해서 줄행랑을 놓으려고 계획했던 상대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지 생각할 때 무척 오래 전의 일 같은 다른 사람의 옛이야기 같은 장구한 세월의 착각을 느끼게 되었다. 피차의 처지가 몇 달 동안에 왜 그다지도 변했던가, 어찌어찌 하다가 여기에 지금 이 해쓱한 병든 사나이가 눕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불을 켤까.”
어두운 데서 주의를 돌려보려고 제의를 했으나 단주는 허수아비같이 침대 위에 일어나 앉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요새는 밤중에두 불을 끄구 있는데. 캄캄한 속에서 눈을 펀둥펀둥 뜨구 있노라면 별별 신기한 환영이 다 눈 속에 닥쳐오면서 밤새도록 동무가 되어 주거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 올리는 손가락이 아스파라거스같이 길게 보인다.
“올빼미라구 캄캄한 속에서 눈을 펀둥펀둥 뜨구 있을까. 그러니까 몸이 자꾸 파래가면서 꼴이 저 모양이지.”
“올빼미와 다른 것 없지.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 수두 있으니까.”
딴은 어둠 속에 솟아 있는 단주의 자태를 미란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것으로 보았다. 어둠 속에 솟아 있는 하아얀 초상――고전의 명화 속에 그런 그림이 있었던 듯이 있을 듯이 짐작된다. 얼굴의 잔 선들은 말살해 버리고 윤곽만을 드러내고 그 윤곽 속에 이목구비를 짐작케 하는 어둠의 수법이 놀라운 것이었다. 약한 것이 약하므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있다. 강한 것이 아니고 영웅이 아니고 천재가 아니고 약하고 병들어 있는 까닭에 아름다운 것――그날의 단주의 자태는 그런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