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는 읽고, 노인은 쓰고… 詩가 돌아왔다
젊은이는 읽고, 노인은 쓰고… 詩가 돌아왔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8.04 13:43
  • 호수 5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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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 시 베끼고 사진 찍어 SNS 공유… 중쇄 찍는 등 판매 증가
문해교육 수료 노인들 문집‧시화전 내… 일부는 개인 시집도 출간

#1.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즐기는 대학생 이슬비(21) 씨는 최근 자신만의 취미가 하나 생겼다. 요새 주목받는 황인찬 시인의 시를 필사해 이를 자신의 SNS에 올리는 것이다. 이 씨는 “시를 베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말했다.
#2. 얼마 전 문해교실을 수료한 홍 모(75) 어르신은 최근 경기 성남동복지회관 대표로 선발됐다. 그가 깨우친 한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시화(詩畫)가 뽑혀 복지관 대표로 전국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홍 어르신은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 소설·영화 등에 밀려 인기가 시들했던 시가 대중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진은 한 복지관에서 시화전을 준비하는 어르신들의 모습.

2000년대 이후 긴 침체에 빠지며 변방으로 밀려났던 시(詩)가 최근 노인들과 2030세대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문학의 중심으로 다시 이동하고 있다. 전공하는 사람들만 읽고 쓴다 해서 ‘그들만의 문학’으로 취급받으며 대중들에게 멀어졌던 시는 SNS에 필사한 시 구절 등을 올리는 젊은 사람들과 문해교실 수료 후 시를 쓰는 노인들에 의해 새롭게 소비되면서 대중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87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2위를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 차지할 정도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구조로 전개되는 국내외 작가의 소설과 상업영화가 급부상하면서 2000년대 이후엔 베스트셀러 시집을 보기 어려워졌다.
이처럼 한동안 잊혀졌던 시는 SNS의 바람을 타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이전처럼 심각하게 시를 분석하며 읽기보다는 SNS에 자신이 공감하는 시 구절을 공유하거나 시 낭송회에 참여해 시인들과 직접 소통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시에 접근하고 있다. 연예인을 쫓듯 시인을 따르는 ‘팬덤 문화’까지 생겼다
이로 인해 덩달아 시집 판매량도 늘고 있다. 출판계에는 ‘시집은 중쇄(초판이 다 팔려 책을 다시 인쇄하는 일) 찍기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판 1500~2000부를 다 팔고 중쇄를 찍는 시집은 김용택‧도종환 등 중견시인이나 우수도서 선정 시집이 아니면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30대가 적극 구매층으로 유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독서인구는 고령화되는 추세지만 시집 구매 연령대는 10년 전(53%)이나 지금(52%)이나 20∼30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올해 시집을 낸 시인 중 심보선‧천양희‧임솔아‧서효인‧허은실‧김개미‧김상미‧김준현 등이 중쇄를 찍었다. 지난달 출간된 심보선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한 주 만에 1만 부를 찍어 놀라게 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예전엔 중쇄를 찍는 데까지 최소 1~2년이 걸렸지만 요즘은 3~6개월 만에 중쇄에 들어가는 등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2030세대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시를 즐긴다. 전체 시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공감할 수 있는 몇 구절만 필사하거나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시는 어렵다’는 인식이 희미해지고 각자 방식대로 즐기면 된다는 인식이 커진 것이다.
시의 치유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청년실업과 사회 구석구석의 ‘갑질’ 행태 등 한국 사회의 각박한 현실에서 시가 위로를 준 점도 인기 요인이다. 최근 등단한 젊은 시인들이 운둔해 시만 쓰는 대신 SNS나 각종 시 낭독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독자와 만나는 점도 한몫했다.
반면 노인들은 읽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쓰는 방식으로 시를 소비하고 있다. 문해교실 혹은 복지관 등에서 운영하는 문학강좌에 참여한 노인들이 쓴 시를 모아 문집을 만들거나 시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시를 즐기고 있다.

▲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필사해 올린 SNS 사진(왼쪽)과 발매 일주일만에 1만부를 찍어 화제를 모은 심보선 시인이 신작 시집

한발 더 나아가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활동하는 노인들도 있다. 충북 음성군에 거주하는 한충자(86) 어르신과 조순례(79) 어르신이 대표적이다. 종합문예지인 ‘참여문학’ 여름호를 통하 나란히 등단한 것이다.
또 두 어르신은 2009년 장례비로 모아둔 1000만원으로 첫 시집인 ‘약해지지 마’를 출간해 밀리언셀러 작가가 된 시바타 도요(1911~2013)처럼 등단 이전부터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시집도 출간했다.
72세까지 문맹이었던 한 어르신은 음성군노인복지관에서 한글을 터득한 후 75세부터 시를 배워 77세때 희수 기념으로 첫 시집 ‘봄꽃은 희망이고 가을꽃은 행복이다’를 펴냈다. 이후에도 펜을 놓지 않은 한 어르신은 충북노인문화예술제 1회와 3회 문예 부문에서 대상 수상, 일산종합복지관에서 주최한 제5회 전국어르신문학작품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두 번째 시집 ‘백지장 하나 들고’를 출간하면서 주목받았다. 한 어르신은 “더 노력하고 공부해서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조순례 어르신도 시를 공부한 지 2년 만인 지난 2011년 겨울 ‘늦게 피는 꽃도 향기 짙어’를 발간했고 2015년 충북노인문화예술제 문예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조 어르신은 “앞으로도 농촌생활에서 겪는 애환과 노년의 즐거움을 담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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