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노숙의 시’, 노숙자의 시선으로 본 2017 대한민국
연극 ‘노숙의 시’, 노숙자의 시선으로 본 2017 대한민국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9.01 13:47
  • 호수 5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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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비판하며 소시민 위로… 긴 대사 소화한 연기 압권

독립운동가 박열의 생애를 다루며 호평과 함께 예상 밖 흥행을 기록한 영화 ‘박열’은 그가 쓴 ‘개새끼’라는 시를 낭독하며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청년의 울분과 애환을 강한 어조로 담은 시는 영화 전체 분위기를 암시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 8월 22일 서울 대학로 30스튜디오 무대에서도 ‘개새끼’가 울려 펴졌다. 노숙인 ‘김 씨’가 울분을 토하며 카피라이터 정철의 시 ‘나는 개새끼입니다’를 인용해 낭독하자 극장은 숙연해졌다. 그가 울부짖은 이유는 무엇일까.
두 노숙자의 대화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연극 ‘노숙의 시’가 오는 9월 17일까지 서울 대학로 30스튜디오 무대에 오른다. 작품은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동물원 이야기’는 뉴욕 센트럴파크 벤치에서 두 남자가 설전을 벌이며 현대인의 고뇌를 표현한 작품인데 ‘노숙의 시’는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지나온 두 노숙자의 이야기로 번안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공연을 통해 검증받은 구성과 극적 장치와 노숙인의 입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이야기는 벤치에 앉아 있는 ‘김 씨’에게 허름한 차림새의 ‘무명 씨’가 다가와 말을 걸면서 시작된다. 1959년 사라 호 태풍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무명 씨의 이야기는 1967년 동백림 사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대선 이후 반동의 시대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쳐 지난해 겨울 광화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직장을 잃고 가족마저 포기한 김 씨는 송탄 미군기지, 서울역 등지에서의 유년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결국 두 사람이 나누는 진솔한 대화와 격렬한 갈등은 현재 한국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물음들이 담겨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토해내던 무명 씨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왕처럼 행세하던 ‘하숙집 여주인’과 그녀가 키우는 ‘검둥개’ 이야기를 통해 전직 대통령과 맹목적으로 충성했던 간신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검둥개를 자신의 그림자에 비유하는 무명 씨를 통해 어쩔 수 없이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도 보낸다.
해직 기자 출신 60대 노숙자 ‘무명 씨’는 명계남이, 40대 실직자 ‘김 씨’는 오동식이 연기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노숙의 시’는 순전히 두 배우의 대사로 진행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두 배우의 숨막히는 연기 대결로 작품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한다. 60대 중반에 들어선 배우 명계남은 나이가 무색한 에너지를 공연 내내 뿜어낸다. 걸핏하면 등장하는 A4용지 2~3장 분량의 대사를 한 호흡으로 끌고 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오동식 역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무사안일의 소시민을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러시아가 낳은 대표 클래식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과 영국 대표 록그릅 핑크 플로이드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Shine On You Crazy Diamond) 등 강렬한 음악도 몰입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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