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인 듯 내 딸 같은 내 딸 아닌 내 며느리
내 딸인 듯 내 딸 같은 내 딸 아닌 내 며느리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7.10.23 09:13
  • 호수 5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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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짓는
‘전원일기’ 속 며느리는 옛 이야기

며느리를 딸같이 생각한다지만
그 말이 정말일까
며느리도 백년손님 돼 가는 듯

길고 긴 연휴를 돈 안들이고 알차게 보내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때를 놓쳐버린 드라마를 ‘TV 다시보기’를 통해 계속해서 보는 것이다. 아침 먹고 보고, 점심 먹고 보고, 저녁 먹고 보고 일어나서 또 보고.
이것저것 보다가 30년 전 인기 많았던 농촌드라마 ‘전원일기’를 만났다. 낯이 익어 그랬나 정겨웠다. 진짜 부부로 알았다는 시청자들이 많았을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부부연기를 잘 해냈던 최불암과 김혜자. 지금은 노인이 되어버린 김용건과 유인촌의 풋풋한 모습. 묘한 톤의 목소리로 사람을 울고 웃기던 일용엄니와 그 아들 일용이.
마침 때맞춰 나온 장면도 명절 풍경이었다. 식사하고 내놓은 커다란 상을 받아 부엌바닥에 내려놓고 과일을 들여보내고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탕국에 찬 밥 한 덩어리 말아 먹는 큰며느리의 얼굴이 짠하다. 제주도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그녀는 원래 약대 출신이었다. 들어가기도 힘든 약대를 갈 때에는 약사를 하려고 갔을 터인데 지금은 시골로 시집와서 가난한 종갓집 식구들 밥해주고 빨래하며 그 뒷바라지만 하고 있다.
이렇게 살 것을 왜 그 힘든 공부를 했을까 공부한 것을 후회하는 건지, 아니면 그 힘든 공부를 해놓고선 왜 이렇게 사는 건가 처지에 대해 후회하는 건지. 그때 시어머니가 그녀를 보고는 “친정엄마 생각나서 그러는구나. 나중에 시간 내서 다녀와라”하며 등을 토닥거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는 참 따뜻한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3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보니 여러 가지로 많이 어색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이런 걸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는가 보다. 예전에는 아들 낳을 때까지 아이를 계속 낳는 집이 많아 급기야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란 표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임신하면 성별테스트를 해서 아들이면 낳고 딸이면 낙태를 시키던 사람들도 많았고, 딸이 공장에 가 기름때 묻은 돈을 벌어서 오빠랑 남동생 학비를 대던 집도 많았다. 아들을 왜 그리 선호했을까.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이니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오직 아들뿐이어서 그랬나. 아님 내 성을 물려줄 수 있어서 그런가.
추석 명절 사흘 전. 집으로 올라오는 샛길에 동네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마트에서 배달시킨 식자재들을 차에서 열심히 내리고 계셨다. 뭘 그리 많이 사셨냐고 물었더니 “추석 때 아들 내외가 온다 해서 며칠 동안 먹일 것들이야. 손자들이 아주 먹성이 좋아”라고 말씀하시는 얼굴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며칠 지난 추석 다음날. 배추밭에서 벌레를 잡고 계신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서울 식구들은 다 어디 갔어요?”라고 물으니 잠도 안자고 그날 다 갔단다. 손자들 시험이 얼마 안 남았고 해서 가라 했단다.
“아들은 며칠 더 있다 가겠다는데 며느리 눈치가 보여서 내가 가라고 했어. 그러다가 싸우면 내 아들만 더 속상하지 뭐. 며느리도 백년손님인겨.” 섭섭했겠지만 현명하게 잘 넘기셨다 싶었다.
요즘 며느리들은 차별받고 자란 세대들이 아니다. 전원일기의 고두심을 기대하면 내 속만 끓기 십상이다. 딸인 줄 알고도 그들의 부모는 낙태 시키지 않았으며 공장에 나가 돈 벌어 오빠 학비를 대주지도 않았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금은 자식에게 엄마 성을 물려줄 수도 있고, 고위직 직장도 능력만 있으면 남녀차별 없이 널려있는 게 현실이다.
고시나 공무원 시험 패스한 사람들 절반 이상이 여자이며 변호사, 의사들의 남녀 비율도 비슷해지고 있다. 이렇게 내 며느리도 내 아들과 똑같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부하고 직장 얻고 살다가 결혼해 내 며느리가 된 거다.
며느리는 딸이고,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도 이젠 바뀌어야한다. 며느리가 딸이면 사위도 아들이고, 사위가 백년손님이면 며느리도 백년손님이다. 많은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딸로 생각한다고들 하던데 여기 그 말이 맞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이 있다.
맞벌이 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손주를 데려다 집에서 봐주시던 어느 시어머니 얘기다. 심성이 고우신 이 시어머니는 애쓰는 며느리가 안쓰러워서 며느리가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만들어 놓고 손주를 안고 기다리는데 며느리가 퇴근해서 돌아왔다.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어머니 오늘 메뉴는 무엇이에요?”라고 물었단다. 갑자기 화가 솟구치더란다. 자기 생각해서 손주 돌보면서도 만난 것 해놓고 기다리기는 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나와 버렸단다.
만약 퇴근해 돌아온 며느리가 딸이었다면? 소파에 앉으며 오늘 메뉴를 물었을 때 “힘들었지? 너 좋아하는 닭볶음탕 해 놨다. 빨리 씻고 와서 밥 먹어라”하며 손자를 등에 업고 따뜻할 때 닭다리 하나라도 빨리 먹이고 싶어 부지런히 가스 불을 켜고 밥을 그릇에 담고 있었을 게다.
‘내 딸인 듯 내 딸 같은 내 딸 아닌 내 며느리’란 말을 늘 명심해야 섭섭한 마음이 덜 들것 같다. 며느리도 점점 백년손님이 되어 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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