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늦깎이 가수 데뷔한 위안부 할머니의 노래
[기고]늦깎이 가수 데뷔한 위안부 할머니의 노래
  • 정용쇠 서울 은평구
  • 승인 2017.11.03 14:17
  • 호수 59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인가수 길원옥입니다.”
아직 혹독한 더위가 계속되던 지난 여름, 한 신인가수가 청계광장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쥐고 가수 황정자의 ‘남원의 봄 사건’을 열창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그는 무대가 처음인 듯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언제 떨었는지도 모르게 당당하게 노래를 이어나갔다.
“남원에 봄 사건 났네 전라남도 남원군 바람났네 춘향이가 신발 벗어 손에 들고 버선발로 걸어오네.”
신인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제5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나비문화제를 찾은 시민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89) 어르신의 노래를 열렬하게 반겨줬다.
여성에게 수치스러웠을 과거를 당당히 고백하고 대중 앞에 나선 길 할머니는 평소 즐겨 부르던 애창곡 15곡을 담은 ‘길원옥의 평화’를 발매하고 늦깎이 가수로 데뷔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의 노래는 팔순을 넘은 필자에게도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이날 길 어르신은 ‘한 많은 대동강’도 열창했다. “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부분을 부를 때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길 어르신의 노래가 그랬다. 그에게 자꾸 가슴 아픈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데 더 큰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길 어르신의 음반은 2000장을 찍었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정식으로 판매하지 않고 대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10만 원 이상 후원하는 시민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기로 했다. 이 역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길 어르신의 데뷔는 필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줬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2002년도 한 통신사의 광고가 이제는 현실이 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늙는 것이 아닌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끊임없이 고민하고 안주하지 않은 것, 성장을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날 길 어르신이 불렀던 두 노래가 아직도 나의 귓전에 울리고 있는 듯하다. 광장을 채웠던 시민들이 느꼈던 감동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길 어르신이 ‘전국노래자랑’을 비롯한 음악방송에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위안부 피해자 길 어르신의 삶이 일제 36년간의 잔혹했던 과거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 그의 노래는 일본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과거사를 청산하는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