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화수회를 찾아가다]불사이군 불굴의 기백 이어 600여녀 가통 전승
[명문가 화수회를 찾아가다]불사이군 불굴의 기백 이어 600여녀 가통 전승
  • 이미정
  • 승인 2007.10.26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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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변씨 인물

 

신라 고려 조선조에 관직 중용 많아

 

<사진>구양서원.

 

신라시대


변품(邊品):진평왕대를 효시로 북한산주 군주(北漢山州 軍主)로서 삼국통일 전 수행중에 단금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 변산(邊山):삼국통일 후 대 당외교에 공헌함, 변멸성(邊蔑性):신라말 토호 아들 균여대사 불교문학의 선각자

 

고려시대


변려(邊呂):몽고 항쟁의 공으로 상장군 및 태천백에 봉해짐, 변순(邊順):심양후, 려조(麗朝)에서는 찬성사(贊成事), 변량(邊諒):심양후 승습, 려조에서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추증됨

 

조선시대


변극충(邊克忠):별좌증 가선대부호조참판(別坐贈 嘉善大夫戶曹參判), 변극민(便克愍):형조참의(刑曹參議), 변차희(邊次憙):휘(諱) 상희(尙憙), 자(字) 회문(晦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변상조(邊尙朝):남부령(南部令), 변상근(邊尙覲):선절장군 충무시위사 중령호군 겸 군기시판관, 변상회(邊尙會):호조·예조참판 증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원평군, 변상동(변상동):통정대부 행 사헌부감찰 겸 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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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변씨 인물


정·재·교육계 등 왕성한 활동

 

<사진>사조묘역 전경.

 

정치


변정일:법학박사, 전 국회의원, 전 헌법재판소사무처장, 법무법인 한별대표변호사, 변우량:문학박사, 전 국회의원, 변웅전:전 문화방송 아나운서실장, 전 국회의원, 중앙화수회고문, 변창선:윤보선 전 대통령 경호대장

 

경제


변정구:경영학박사, 전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수석부회장, 현 원주변씨화수회 회장, 변창운:한라일보 부회장, 전 한라일보 대표이사

 

교육


변사호:전 서울대학교수, 변명대:생농학박사 경북대교수, 변태섭:문학박사 서울대명예교수, 변동호:의학박사 서울대교수, 변시지:화가, 전 제주대학교 교수, 변우창:전 고려대학교 법과대교수, 변동수:전 명지전문대학교수, 변시민:문학박사, 전 제주대학장, 변형윤:경제학박사, 전 서울상대교수

 

사법


변오연:서울지방법원판사, 변찬우: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변선종:변호사, 변재승:전 대법관, 법무법인 화우고문변호사, 변현철:대법원 공보담당판사, 변창범:대구지방검찰청 검사

 

군(軍)


변해공:육군예비역 소장, 변충구:육군예비역 소장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있으나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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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은 신도비각.

 

원주변(邊)씨 화수회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취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음미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지면을 활용하여 각 성·본 대종회 및 종친회의 단합과 교육, 홍보효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명문가에 대한 이번 기획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이용 있으시기를 바라며, 지난 기사는 인터넷 웹사이트(www. 100ssd.co.kr)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글·최종동 편집위원

 


본관, 시조(始祖)와 유래(由來)


원주 변씨의 시조 대은(大隱) 변안열(安烈)은 충숙왕 3년(1334년)에 원나라의 심양에서 태어난 황주인(黃州人)이다. 고려에서 영삼사사(領三司事)와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조부 순(順)이 심양에 의거해 심양후(瀋陽侯)에 봉해졌고, 부친 양(諒)과 형 안백(安伯)이 대를 이어 봉작을 계승했다.

 

충정왕 3년(1351년)원조의 호방(虎滂, 武科)에 장원으로 합격해 무인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에 봉해져 왕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함께 환국하게 되자 수행하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변안열의 시대가 열린다. 그는 몽고 세력을 배경으로 하고 공민왕 및 노국공주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니면서 고려에의 충성을 아낌없이 쏟는다. 당시의 명문 원주원씨의 딸과 혼인해 공민왕으로부터 원주를 사향(賜鄕)받음으로서 원주변씨의 시조가 된다.


우리나라에 변씨는 원주(原州)변씨, 황주(黃州)변씨, 장연(長淵)변씨가 있으나 모두 황주변씨에서 분파했으며 인구수로는 원주변씨가 80% 이상 차지하고 있다.


공민왕 10년(1361)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켜 이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개성을 수복하고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瑩)장군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했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楊廣全羅道)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했다.

 

이어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운봉(雲峰)인월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단양·안동에 출몰한 왜구를 몰아낸 후 원천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후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창왕 1년(1389)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의 제거와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등과 함께 연루되어 한양에 유배된 뒤 처형되었다.


변안열은 무장으로서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이방원이‘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와 변안열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을 때, 포은은 ‘단심가(丹心歌)’로, 변안열은 ‘불굴가(不屈歌)’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는데, 포은의 단심가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대은의 불굴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임금에 대한 신하의 일편단심을 노래한 이 시조는 원천부원군 변안열이 지은 불굴가로서 다음과 같다.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  任汝之爲吾不辭 有欲奪吾主 此事吾不屈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마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켜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포은의 단심가가 선비다운 매운 뜻을 펼쳤다면, 변안열의 불굴가는 무인(武人)의 씩씩하고도 요동 없는 송죽(松竹)같은 절개가 결연히 표출되어 있다. 그래서 해동악부(海東樂府)에, “태종이 그 태도에 변함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제거하기로 의논을 모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주변씨는 시조(始祖) 변안열의 이 불굴의 기백을 이어 600여년 가통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1969년 변안열 신도비건립에 박정희대통령이 고유(告由)를 해서 화재가 되었다. 원래 신도비고유(神道碑告由)는 유림(儒林) 또는 문중의 주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나 박정희 대통령(朴正熙大統領)은 “公이 죽음을 사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사직을 위해 순절한 뜻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고유(告由)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400여 성씨가 있으나 씨족의 현조(顯祖)인 비석 건립 행사에 국가 원수가 고유한 예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전국 유림의 발의로 성균관 유도회(成均館 儒道會)에서는 2007년 10월 28일 원주변씨 시조묘역에서 「박정희대통령 고유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한다.

<사진>박정희 대통령 고유 기념비.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 고유문이다.

 

高麗忠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原川府院君 大隱邊公 諱 安烈


朴正熙大統領 神道碑告由紀念碑除幕式

 

維歲次 己酉 辛卯朔 二十二日 大統領 朴正熙 謹告于 高麗忠臣 原川府院君 大隱 邊先生 神道碑 告成之日曰 凜義烈忠 乾坤一蹴 於乎先生 扶綱誰激 瞻彼崧陽 江山  高仰萬情 偉節不息 永闡其功 蔚然大石 歌長又長 千古無  楊路一明 先生降陟 伏惟尊靈 庶斯歆格 尙饗 朴正熙大統領 告由文


1969년 4월 22일 대통령 박정희는 삼가 고려충신 원천부원군 대은 변선생 신도비를 완성했다고 알리는 날에 고합니다.

 

늠름한 의리와 열렬한 충절은 나라가 망할 때 목숨을 던졌습니다.


아! 선생의 충절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저 숭양서원을 바라보니 강산이 높고 우러러보는 많은 사람의 마음은 위대한 충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 공을 드러내기 위해 큰 비석을 세웁니다.


불굴가는 길고 길어 오래도록 그침이 없고 양주길이 한번 밝아졌으니 선생이시여 내려오소서.


삼가 존령이시여 흠향하소서.


상향

 

박정희 대통령은 진충대의(盡忠大義) 앞에 죽음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 세력의 회유(懷柔)에도 굴하지 않는 대은 변안열(大隱 邊安烈)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기 위함이 고유(告由) 이유라 밝혔다.


박정희대통령 고유 기념과 때를 맞추어 백세충의(百世忠義)연보(年譜)를 발간하는데, 연보 내용에는 변씨의 연원과 인물들을 소개했고, 시조 대은 변공안열 선생의 생애를 보다 소상히 수록했다.


특히 포은 정몽주의 ‘대은선생전(大隱先生傳)’과 야은 길재의 ‘대은선생 유사(遺事)’ 목은 이색의 ‘대은선생 행장(行狀)’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변정구(邊鼎九) 원주변씨화수회 회장은“국가원수가 사가(私家)의 현조(顯祖)에게 고유(告由)한 사실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대은공(大隱公)의 지난날의 묻혀 있었던 충의를 공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및 지역대표 365인이 발기하고 전국 유림의 발의로 성균관 유도회에서 고유기념비를 세우니 원주변문(原州邊門)의 더없는 광영(光榮)”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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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층 참여로 화수회 결속 다지자”


■인터뷰 - 원주변씨 화수회 변 정 구 회장


대은공 정신바탕 자부심 갖고 헌신 봉사


시조묘역서 10월 28일 고유기념비 제막식

 

원주변씨화수회 변정구(邊鼎九, 65세) 회장은 시조공으로부터 20세손이고 경북 예천 태생이며 현재 삼신인터내셔널 회장을 맡고 있는 중견 기업인이다.

 

기업경영 이념을 창의, 도전, 책임을 모토로 하고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신속하게’ 라는 경영신조를 가진 긍정적인 사고와 매사에 적극적인 기업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영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과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엘리트 출신이다. (주)삼신양행 대표이사, 서울시 금속가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 환경분과위원장과 국제분과위원장, 그리고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소기업진흥재단 이사를 비롯하여 재경 예천군민회장 등 기업과 병행하여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 정책금융의 유효성 평가에 관한 실증적 연구 2000’ 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중소기업육성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이다.


종로구 익선동 원주변씨 대은회관에서 변정구 회장을 비롯하여 변동수 고문, 변찬구 고문, 변건우 총무이사, 변창용·변기태 이사 등 임원들을 만나보았다.

 

-화수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면?


회장직을 맡은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는데, 항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젊은 층의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알아야 되겠고 또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자손된 도리인데 말입니다.

 

-화수회 행사 중 가장 큰 행사는?


역시 시조공 위패를 모신 구양서원 춘계 향사를 들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5~6백명의 종인들이 참석하여 시조공의 음덕을 기립니다. 이달 28일은 시조묘역에서 큰 행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신도비 고유(告由)기념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인데, 많은 종인들의 참여가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화수회 운영 재원마련은 어떻게 하십니까?


특별히 화수회 차원에서 하는 수익사업은 없고 임원들에게 분담금을 걷고, 협찬금과 4년 전에 마련한 원주변씨 대은회관에 세든 사람들로부터 걷는 부동산 임대수입 등으로 충당합니다.

 

-대은 시조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사직을 위해 순절했지만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불굴가는 포은의 단심가보다도 덜 알려졌는데요?


대은 선생의 공적으로 보면 최영 장군과 비견되고, 충신으로는 포은(圃隱)과 같은 반열이며, 절의로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에 손색이 없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아 그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태조 건국시에 이방원의 정적이 된 것이 불운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변문(邊門)은 이조 500년 동안 사림에서 벼슬길에 오른 분이 적은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선조를 꼽는다면?


물론 시조(始祖) 대은 변공안열(大隱 邊公安烈)입니다. 포은의 ‘대은선생전’이나 목은, 야은의 제문(祭文)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3은의 공통된 칭송으로 미루어 봐도 훌륭한 선조임에 틀림없고 그로 인하여 우리 변문은 긍지를 느낍니다.

 

대은공의 정신을 바탕으로 종친들의 결속력이 어느 성·본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심을 갖게 되고 현재 80여명의 임원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화수회가 발전되어가고 있습니다.


1969년 신도비 건립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고유(告由)를 하였는데, 씨족의 현조(顯祖)인 비석 건립행사에 국가원수가 고유를 한 예는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원주변씨 일문이 자긍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종인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종중 행사에 되도록 많이 참여하여 서로가 화합하고 화수회 발전을 위하여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 참여를 독려하고 특히 젊은 층의 참여율을 높여 혈연을 매개로 더욱 결속력을 다지도록 하는 것이 저의 과제입니다.


최종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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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 주요 세거지(世居址) 변천


원주·황주·안동 등 강원 충청도 많이 거주

변세청의 3대 7인 과거 급제 제주 안착

<사진>추원재 전경.


별좌공파(別坐公派)는 변안열 이래로 경기도 양주와 변처령(邊處寧)의 대 이래로 인천 등지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고 있으므로 일찍이 이들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 같다.


참의공파(參議公派)는 4세 변재중이 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 머물러 살았으므로 이후 평북 태천땅에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첨추공파(僉樞公派)는 5세 변희이(便希李)가 연산조 무오사화 때에 경북 예천으로 옮겨가 살았고, 6세 변봉의 아들들이 황해도 안악·봉산·송화, 평남 강서의 함종 등지에 산거했으며, 6세 변점의 후계가 강원도 원주에, 5세 변희이의 후계는 대체로 변영순의 대 이래로 지금의 경북 영풍과 안동의 금계, 봉화의 내성(乃城), 군위의 의흥 등지에 정착, 세거했다.


남부령공파는 강원도 홍천과 6세 변론석(邊論碩) 이래로 함남 고원에 살았고, 호군공파(護軍公派)는 지금의 경기도 개풍과 의정부 등지에, 참판공파(參判公派)는 4세 변우(邊佑) 이래로 경기도 양평의 양근에 자리잡은 것을 비롯하여 삼척, 강릉, 홍천, 원주 등 강원도 일대와 충남 연기, 부여, 공주, 논산 등 충청도 일대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감찰공파(監察公派)는 6세 변용원(邊用瑗)의 대 이래로 충북 진천에 세거했으며, 군수공파(郡守公派)는 3세 변상빙(邊尙聘) 이래로 원주에서 살다가, 5세 변억령(邊億齡)의 대에 일부가 함남 북청으로 옮겨갔다.


부마공파(駙馬公派)는 4세 변견(邊堅)이 서울에서 지금은 충남 대덕에 속해 있는 회덕으로 옮겨갔으므로 그 후계가 그곳에 정착했고, 변견의 손자인 변회(邊誨) 이래로 부여의 석성에, 변연(邊演) 이래로 정선에 일부 자손들이 터를 굳혔다.


다시 10세 대에 와서, 변석(邊錫)의 부인 청주한씨가 임진란을 피해 아들과 함께 강원도 양구로 갔던 사실과 11세 변우서(邊禹瑞)가 삼척으로 퇴거한 사실이 ‘丙寅譜’에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도 자손들이 자리 잡았다고 믿어진다.


사용공파(司勇公派)는 경북 금능의 지례 등지에서 세거하였고,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는 3세 변세청(邊世淸)이 처자와 함께 제주도로 들어가 정착한 뒤에 그곳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으로 믿어진다.


1930년 경, 원주변씨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경북 안동군 서후면, 제주도 제주시 일원, 황해도 연백·옹진·봉산·송화군 일원, 평북 박천군 동남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상가리에도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곳 상가리 마을은 중랑장공파의 후손들이 5백여년 가까이 지켜온 원주변씨의 터밭이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인물은 변씨의 입도(入島)시조 중랑장 변세청의 14대손 변성보(邊聖輔)이다.


그는 젊어서 상가리 이웃인 납읍마을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병에 걸린 늙은 스님을 돌봐주었더니 그 스님이 좋은 집터로 잡아주었던 곳이 바로 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전체 90여가구 중 60여가구 300여명이 원주변씨 일문이다. (중앙일보 발행 성씨의 고향 참조)


특히 중랑장공 변세청의 9대, 10대, 11대의 3대가 연이어 무려 7인이 과거에 급제하여 제주도에서는 일찍이 명문거족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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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 벌열(閥閱)


공신(功臣):변수(邊脩) (중종조·중종반정2등공신), 변사겸(邊士謙)(중종조·중종반정4등공신),

 

변흡(邊   ) (인조조·이활란토평2등공신)

문형(文衡):변량걸(邊良傑)(선조조)

호당(湖堂):변숙(邊肅)

청백리(淸白吏):변수(邊脩)(중종조), 변량걸(邊良傑))(선조조), 변유(邊宥)

절의(節義):변유(邊宥) 정축심량배종신(丁丑瀋陽陪從臣)

장신(將臣):변협(邊協) (선조조포도대장), 변량걸(邊良傑) (선조조훈련대장),변응성(邊應星) (광해조 훈련대장)

문집(文集):동호집(東湖集) 변영청(邊永淸, 1516~1580), 간재집(簡齋集)변중일(邊中一, 1575~1660), 옥성헌일고(玉成軒逸稿) 변상완(邊尙緩, 1696~1757), 구은유고 (龜隱遺稿)변

 

진탁(邊振鐸, 1769~1836), 담계유고(擔溪遺稿) 변종기(邊種基, 1854~1937), 면와집(勉窩集)

 

변태균(邊台均, 1867~1942), 청강유고(晴崗遺 稿) 변호적(변호적, 1915~1950)

시조묘(始祖墓):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산97번지

족보간행(族譜刊行):을묘보(乙卯譜)(세종17년,1435년), 정축보(丁丑譜)(중종12년, 1517년),

 

신해보(辛亥譜)(명종6년, 1551년), 경신보(庚申譜)(정조24년, 1800년), 계해보(癸亥譜)(철종14년, 1863년), 갑인보(甲寅譜)(1914년), 기해보(己亥譜)(1959년), 병인보(丙寅譜)(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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