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만에 빛나다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만에 빛나다
  • 이미정
  • 승인 2007.10.2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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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금동대향로 발견 이래 최대 성과… 왕흥사 목탁 터서 발굴

<사진>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0월 2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품 일체를 공개했다. 사진은 금은동 사리.

 

정확히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 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황금 사리병을 담은 청동 사리함의 몸체에는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다.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이다.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창왕 13년’(567년) 명문이 새겨진 석제 사리외감(舍利外龕, 옆으로 집어넣는 방식의 사리안치용 상자)이 발견된 적은 있으나 사리외감 속의 사리병은 도굴된 뒤였다.


즉,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 사리병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사리병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인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백제 사리병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10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청동사리함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 하단에 마련된 사리안치용 석제의 한쪽 끝에 뚫린 사리공에 봉안돼 있었다.


청동사리함(높이 10.3cm, 폭 7.9cm)은 발굴 당시 꽃봉오리 모양의 뚜껑꼭지가 떨어져 내부에 흙탕물이 차 있는 상태였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고 해석된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의 고도에서 발굴한 최대의 성과”라고 말했고,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 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금, 은, 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점 등에서 이번 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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