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이경설
‘눈물의 여왕’ 이경설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4.06 13:46
  • 호수 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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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에 은막에 데뷔

가수 겸 배우로 활동

1932년에 이경설이 발표한

가요 ‘세기말의 노래’에는

민족의 아픔 절절이 담겨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줄줄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비극배우는 누구였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전옥(全玉, 1911~1969, 본명 전덕례)의 이름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전옥보다 먼저 ‘눈물의 여왕’ 원조(元祖)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입니다.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銀幕)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애절한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외롭게 살다가 기어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경설은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세상의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북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을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극작가 현철(玄哲, 1891~1965)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작사가 왕평(王平, 1908~1940, 본명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작곡가 김용환(1912 ~1949)과 더불어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을 전전하며 떠돌이로 전국을 유랑했습니다. 이 무렵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몸이 아파도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서럽고 슬픈 삶을 살았지요.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東半藝術團)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입니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대중예술의 활동터전을 빈번히 옮겨 다녔습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언론은 이경설을 특별히 주목받는 배우로 지면에 널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세리프와 박력이 느껴지는 연기가 이경설의 특장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함경도 억양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법이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었나 봅니다. 

배우 이경설이 정식으로 가수가 되어서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1년 봄입니다. 그녀는 생애를 통틀어 도합 44종의 음반을 냈는데, 돔보레코드에서 10편, 시에론레코드에서 6편, 폴리돌레코드에서 28편을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세기말의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1932년 10월에 발표된 이 가요작품은 박영호 작사, 김탄포(김용환) 작곡으로 만들었는데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국토와 민족의 아픔, 불안감 따위를 매우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거미줄로 한 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시들퍼라 거문고야 내 사랑 거문고/ 까다로운 이 거리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세기말의 노래’ 1절

각 소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까다로운 이 거리’, ‘뒤숭숭한 이 바다’, ‘어두워진 이 마을’ 등은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 때문에 빚어진 우리 국토의 고통스런 현실과 환경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들입니다. 작사가 박영호(朴英鎬, 1911~1953)는 고통과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라는 우려 섞인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933년으로 접어들어 이경설의 안색은 표시가 나도록 창백해지고 기침과 각혈의 횟수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극작가 이서구(李瑞求, 1899~1981) 선생은 1930년대 중반, 이경설이 평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 신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증언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경설은 1934년 8월28일 청진의 신암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불과 22년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아무리 요절(夭折)로 애달픈 삶을 마감했다 하더라도 방년 22세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이토록 단명운(短命運)을 타고난 것인지요?

비운의 배우 이경설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90년 세월이 가까워옵니다. 오로지 무대를 집과 터전으로 삼고 가난과 굶주림을 이 악물고 견디며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불살랐던 배우 이경설! 우리는 그녀가 남긴 사진 속의 여러 표정들을 주의 깊게 지켜봅니다. 제국주의 통치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 우리는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가슴조차 꽉 막혔던 겨레의 억색(臆塞)을 대신하여 짧았던 일생을 연기와 노래로 울어주고 조절하며 삶의 중심을 유지시켜주었던 이경설! 그녀의 애틋한 영혼은 지금도 민족사의 숨결 속에서 촉촉한 위로와 격려로 살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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