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1] 취하나 깨나 다 임금님 은혜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1] 취하나 깨나 다 임금님 은혜
  • 변구일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선임연구원
  • 승인 2019.07.05 14:54
  • 호수 6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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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나 깨나 다 임금님 은혜

세 해 동안 새긴 경계 가슴에 늘 간직해 왔으니

국화를 마주해도 술잔은 마주하지 않는다오

서성의 달빛 아래 어주(御酒)를 특별히 내리시니

이 몸 취하고 깨는 건 다 임금님 은혜라네

三年銘鏤戒常存 (삼년명루계상존)

縱對黃花不對樽  (종대황화불대준)

宮醞特宣西省月  (궁온특선서성월)

此身醒醉摠君恩  (차신성취총군은)

-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서파집(西坡集)』 권8「이날 밤 입직하는 중에 특별히 하사하신 내온과 어선을 삼가 받고 느낌을 적다.[是夜直中, 伏蒙特宣內醞御膳, 志感]」


이 시는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장가 오도일(吳道一)이 56세 때 지은 것으로, 그가 53세 때 겪은 사건으로 인해 3년 넘게 술을 끊은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금주(禁酒)의 장본(張本)이 된 사건은 숙종 23년(1697) 봄을 지나 4월이 접어들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가뭄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숙종이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거둥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도일은 임금을 수행하여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으로 술잔을 올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하필 그는 각질(脚疾)을 앓고 있었고 각질을 고치려고 다리에 뜸을 뜨다 생긴 상처까지 겹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술잔을 들고 계단을 간신히 오르며 잠시 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승지가 그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술잔을 엎어버렸고 술잔을 다시 올리느라 결국 제사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일을 두고 장악원 정(掌樂院正) 유신일(兪信一)이 상소를 올려 그가 이때 술에 취해 있었다며 제사에 불경한 죄를 물어 처벌하여야 한다고 탄핵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제사 때 취해 있었는지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하였는데 결국 당시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가 취해 있지 않았음을 증언하면서 그를 파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 일로 그에게 술을 경계할 것을 타이르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도일은 술을 즐기다 고질(痼疾)을 이루었는데도 너무나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할 만하다. 기억하건대, 옛날 술을 경계하는 시(詩)에,{聖君寵極龍頭選(성군 은총 극진하여 문과 장원으로 뽑혔고), 慈母恩深鶴髮垂(어머니 은혜 깊은데 백발이 다 되시었네), 君寵母恩俱未報(성군 은총 어머니 은혜 모두 보답 못했는데), 酒如成病悔何追(술로 만일 병이 들면 뉘우친들 어이하랴)}하였는데, 오도일이 만약 ‘성군 은총 보답 못하고 병이 들면 후회한들 어이하랴’는 구절을 두고 늘 깊이 유념한다면 어찌 매양 낭패를 초래할 리가 있겠는가?『숙종실록(肅宗實錄) 23년 4월 28일』 

숙종이 인용한 시는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장원 급제한 채제(蔡齊, 988~1039)라는 젊은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출세하여 주색(酒色)에 빠져 공무를 폐하는 지경에 이르자 당시의 명사(名士)였던 가동(賈同)이 그를 보러 갔다가 만나지 못해 경계의 뜻으로 지어 남긴 것이다. 이 시를 받고 채제는 크게 뉘우치고 술을 자제하며 종신토록 크게 취하는 일 없이 늘 경계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올랐다고 한다. 오도일이 3년 넘게 술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정문일침(頂門一針)과도 같았던 숙종의 이러한 하교 때문이었으니 숙종 말고 누가 그의 금주(禁酒)를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3년 뒤 숙종이 내린 어주(御酒)가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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