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늙어서 왜 그렇게 사냐고 눈치 주는 젊은이들에게
[백세시대 / 금요칼럼] 늙어서 왜 그렇게 사냐고 눈치 주는 젊은이들에게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9.09.27 14:13
  • 호수 6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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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의 교훈 알려주는

전래동화 콩쥐팥쥐 전에 대해

젊은 세대는 ‘불공정성’ 꼬집지만

억울함 보복하는 이야기는 

어르신 세대에겐 충분히 공감돼

세월은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동일하다. 동일한 24시간 속에 누군가는 선덕을 쌓고 다른 누군가는 악덕을 쌓는다. 그 옛날 교과서에는 없지만, 옛날이야기 속에는 빠지지 않았던 콩쥐와 팥쥐, 그 끝은 선한 자의 승리와 선한 끝은 있다는 안도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신데렐라나 인어공주가 더 익숙한 요즘 아이들이라지만, 콩쥐와 팥쥐를 ‘쥐’ 이야기로 알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어 아쉬움도 커진다. 세월은 흘렀고 그렇게 콩쥐도 늙고 팥쥐도 늙었다. 콩쥐 이야기를 들었던 귀가 늙었고, 팥쥐를 혼내주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던 입에도 틀니가 들어앉았으니, 항아리 없는 아파트 세상에 두꺼비도 멸종 직전인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오래되었으니 콩쥐팥쥐 이야기를 되새김해보자. 어린 나이 착한 콩쥐는 못되고 심술 맞은 새어머니와 새 자매 팥쥐의 학대를 받고 두꺼비와 참새, 선녀의 남모를 도움을 받아 살아가다, 시내에 떨어뜨린 꽃신 한 짝 인연으로 사랑에 눈먼 원님과 결혼하게 된다. 새어머니를 들였다니 콩쥐 아버지 경제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을 터이고, 고생 중에도 꽃신을 신었으니 낮은 신분도 아니었을 것이며, 원님과 결혼을 했다면 가문도 상당했을 것이나 어떤 환경에서건 학대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콩쥐는 결혼 후에도 팥쥐에 의해 비극적 살해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 남편인 원님을 통해 팥쥐에게 복수하게 된다. 힘들어도 돕는 손길이 있고, 심지어 죽었다가도 살아나 원수를 갚는 콩쥐의 삶은 권선(勸善)의 열매가 맺은 해피엔딩이다.

반면 천하 못난이 심술쟁이 팥쥐를 생각해보자. 어머니가 재가한 걸 보면 아버지를 잃은 상실이 있었고, 새 가정에 들어와 보니 착하고 칭찬받고 동물과 하늘까지도 돕고 심지어 예쁘고 맘까지 착하다고 인정받는 콩쥐가 선점하고 있는 곳에 굴러온 돌로 등장한다. 용모로 비교되고, 성품으로 구별되며, 새아버지의 본 자식으로서 천혜의 연민의 조건까지 갖춘 콩쥐를 이긴다는 것은 이번 생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정투쟁에 나선 팥쥐의 전략은 번번이 실패했다. 심지어 이것이 어린이용 동화라 그렇지 결국 팥쥐 운명은 이리 서술된다. ‘원님은 결국, 콩쥐를 살해하고 자기 아내 행세를 하던 팥쥐를 죽이고 그 시체로 젓을 담가 그 어미에게 보내니 팥쥐 엄마는 젓갈인 줄 알고 먹다가 이내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기절해 죽는다.’ 팥쥐의 삶은 징악(懲惡)을 중심으로 한 새드엔딩이다.

이런 일그러진 재혼 가족 이야기를 성인 동화 버전으로 읽어보면, 죽고 죽이며 물고 물리는  원한의 가족비극 드라마이고 장르는 공포물이다. 동심을 걷어낸 성인들의 이야기로 보자면 콩쥐팥쥐전은 권선도 없고 징악도 없는 열등감의 비극적 종말이요, 보복의 악순환 늪에 빠진 인간군상의 지옥 버전이다. 

그리고 이 전래동화를 보고 듣고 기억하는 세대들은 권선징악 교훈의 수레바퀴를 돌려 늙음에 도달했다. 권선(勸善)을 통해 어른이 되고 징악(懲惡)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던 시대가 지나고, 교육을 통해 권리를 알고 자기 계발을 통해 분석과 성취 열매를 먹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 전래 동화를 듣고 성장한 세대가 늙어, 권리를 내세우는 세대에게 권선을 말하고 성취와 가성비를 주장하는 세대에게 징악을 논의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당신들의 권선이 얼마나 공정한 것인가를 묻고 나이 든 세대의 징악이 얼마나 비인도적인가를 꼬집는다. 물론 그들의 말도 맞다. 배움이 적던 시절 어른들의 말씀은 ‘선’이었고, 그 시절의 공정과 정의는 기준도 모호하고 신분에 따른 불공정성이 공공연했으니 젊은이 말이 맞기도 하다. 

그러나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고 싶고, 원한이 깊고 깊어 자식의 살로 젓을 만들어 그 어미에게 먹이고 다시 그 어미를 죽이고 싶을 만큼 억울한 일들을 당한 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정의의 주제라기보다는 공감의 주제였으리라. 당한 자들에게 ‘공감’은 가능하고 억울한 이들의 ‘심정’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가자로서의 ‘공정’ 이야기가 아니라 당한 자들의 ‘심정’ 이야기라면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탈리오 법칙, 즉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누군가는 잔인하다 하지만, 우리 한쪽 눈을 누군가 뺐다면 어디 우리는 그의 눈만 빼고 싶겠는가? 이러한 감정보복의 비극적 처참함과 악순환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같은 수준의 피해만을 돌려준다는 의미의 동해보복법이 먼지 묻은 과거 역사에 있었을 것이다. 

늙어가면서 누군가는 관대해지고, 다른 누군가는 더 진지해진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꼰대니, 속이 좁아지니, 어쩌니저쩌니 한다. 20~30대 세월의 억울함도 크겠다만, 70년, 80년 묵은 감정의 적분 값을 읽어주기 바란다. 늙어서 왜 그렇게 사는지, 노인의 윤리를 묻는 이들에게 더 배운 자들의 연민과 힘 있는 청춘의 해석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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