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식민지의 등불 가수 박향림
[백세시대 / 금요칼럼] 식민지의 등불 가수 박향림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1.31 14:38
  • 호수 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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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삽입된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는 

1930년대 박향림이 불러 유명

해방후 임신한 채 무대에 올라

산욕열로 아깝게 목숨 잃어

여러분께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영화의 주인공은 미남 배우 장동건과 원빈입니다. 그들의 행복했던 시절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배경음악도 함께 기억하시는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 머, 오빠는 심술쟁이야, 머….’라는 재미난 가사로 펼쳐지는 간드러진 목소리는 바로 박향림(朴響林)이라는 1930년대의 인기가수랍니다. 그녀가 불렀던 ‘오빠는 풍각쟁이’란 노래이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이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이 난 몰라이/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싫여이 난 싫여이/ 내 편지 남몰래 보는 건 난 싫여이/ 명치좌 구경갈 때 혼자만 가구/ 심부름시킬 때면 엄벙땡 하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이 난몰라이/ 밤늦게 술 취해 오는 건 난 몰라/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 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 오빠는 짜증쟁이/ 오빠는 모주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오빠는 풍각쟁이’ 전문)

빠른 비트와 랩을 즐기는 요즘 세대에게는 다소 낡은 느낌에다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까지 느끼게 하지만 코믹한 가사와 흥겨운 리듬은 그들의 감각에도 즐거움을 주었고, 심지어 노래방 애창곡으로 떠올려지기도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수십 년 전에 활동했으며 그동안 완전히 잊힌 가수가 무덤 속에서 다시 환생하여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형국이니 말입니다.

가요는 그 시대 주민들의 마음속 풍경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고 합니다. 슬픔이면 슬픔, 기쁨이면 기쁨의 감정을 노래 속에 곡진하게 담아서 그 시대 사람들보다 먼저 대신하고 위로하며 고통을 분담해 줍니다. 그러므로 가요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작사가, 작곡가, 가수는 언제 어디서든 대중들의 눈빛과 마음을 기민하게 먼저 읽어야 하겠지요. 

이제는 흘러간 일제강점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소할 곳도 없던 시절, 당시 우리 겨레는 가수의 노래를 유성기로 들으며 한과 쓰라림을 달랬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박향림은 깜찍하고 발랄한 음색과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던 식민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밝은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었던 가수였습니다.  

소녀가수 박향림의 간드러진 콧소리로 들려오는 이 노래는 무엇보다도 가사의 내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코믹송입니다. 당시 세태를 너무도 실감 나게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노래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래 가사에 떡볶이, 오이지, 콩나물 등의 음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나 제나 우리 사회의 서민들이 항상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여동생을 괴롭히는 짓궂은 오빠를 ‘풍각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각쟁이는 원래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노랫말에서는 심술쟁이 오빠에 대신하는 말입니다. 지금은 국립극장으로 바뀐 옛날의 일본식 극장 명치좌(明治座)도 등장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모주꾼, 안달쟁이, 모주쟁이, 대포쟁이란 어휘들도 사뭇 정겹습니다.

숨 막힐 것 같은 식민지 암흑의 시기를 박향림은 겨우겨우 버티어 나갔습니다. 일제 말에는 약초가극단, 예원좌 등의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힘겨운 시기를 살았습니다. 드디어 해방되었지만 박향림은 여전히 악극단공연에 참가하여 전국을 부평초처럼 떠돌았습니다. 힘겨웠던 식민지 시대를 잘 견디었던 우리 겨레를 위하여 어떤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1946년 2월에는 무궁화악극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해 박향림은 혼인을 했고, 이후 임신한 몸으로 공연무대에 올랐습니다. 출산했지만 제대로 산후조리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던 박향림에게 힘겨운 지방공연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회복이 덜 된 몸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공연 무대에 올랐던 박향림은 마침내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산욕열(産褥熱)이란 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상을 하직하던 시기에 불과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으로 돌연히 이승을 하직한 박향림을 잃고 가요계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해 7월, 박향림 추도 공연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열렸습니다. 공연의 이름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이었고, 박향림을 너무도 아꼈던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의 박영호 선생이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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