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20] 너는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20] 너는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20.02.28 13:21
  • 호수 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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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어둑한 비 먼저 해를 재촉하는데

산 깊어도 종소리는 울려 퍼진다

꽃향기 연이어 은은히 스며오고

버들 그림자 겹겹이 드리웠구나

오리는 물을 만나 기뻐 노닐고

제비는 진흙 물고 게을리 난다

봄구름은 또한 일이 많기도 해라

누굴 위해 검고 희게 단장하는가 

雨暗先催日 (우암선최일)

山深不礙鍾 (산심불애종) 

花香連淡淡 (화향연담담)

柳影羃重重 (류영멱중중)

得水鳧兒喜 (득수부아희)

含泥燕子慵 (함니연자용)

春雲亦多事 (춘운역다사)

黑白爲誰容 (흑백위수용)

- 서거정 (徐居正, 1420~1488), 『사가시집(四佳詩集)』 권31 「또 전운을 사용하여[又用前韻]」


지금 시인은 산길이나 들길이 이어진 언덕 어디쯤에 있습니다. 서서히 비구름이 밀려들며 일몰을 재촉하는 황혼 무렵입니다. 순간 정적을 깨고 울리는 산사의 종소리, 그 만종의 여운이 오래오래 산중에 메아리칩니다. 햇빛을 머금고 피어난 꽃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맑은 향기를 보내오고, 버들은 실가지들을 그늘로 드리우며 아름다운 봄의 풍경으로 서 있습니다. 그때 모두가 기다리던 단비가 선물처럼 내립니다. 덕택에 오리는 불어난 물 위에서 마냥 기뻐 춤추고 제비는 물기 머금은 진흙을 물고 가서 가족을 위해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햇빛과 비의 축복을 동시에 존재자들이 받을 수 있는 건, 검고 흰 옷으로 바꿔 입으며 단장하는 구름 때문입니다.

이렇듯 시인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햇빛과 비의 축복으로 생동하는 존재자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명에 대한 외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느낀 자연은 오늘날처럼 지배의 대상이나 에너지원으로 보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생활세계’로서의 자연입니다. 또한 이곳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야 자신을 살짝 ‘열어 보이며 다가오는’ 존재자들이 공존하는 경이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경이의 세계를 하이데거(Heidegger)는 단지 속의 포도주를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포도 속에는 햇빛의 따사로움과 하늘의 비나 이슬을 받아들인 대지의 자양분과 그 그늘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돌보고 거둔 이의 땀방울과 수없이 오고 갔을 들길의 발걸음이 배어 있으며, 시간의 숙성과 바람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또한 단지는 그 모든 존재를 품은 포도를 다시 제 가슴에 품고 무수한 계절의 무게를 감내하였을 터이므로, 포도주를 잔에 따를 때 사실 우리는 단지에 있는 포도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에 깃든 하늘과 대지를 선물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이로움을 아는 이는 ‘단지에 담긴 포도주를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가 포도주를 선사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이데거는, 우리가 포도주를 마실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존재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략)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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