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한복패션디자이너
이영희 한복패션디자이너
  • 관리자
  • 승인 2008.10.24 14: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복의 미’ 전세계 전파하는 민간 외교관

“한복은 바람의 옷…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답죠”
 APEC 정상들 입은 두루마기 1년 공들인 작품
11월 3일 갈라쇼˙공연 곁들인 출판 기념회 열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영희(72)씨. 한복을 세계무대에 알리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파해 한복(Hanbok)이라는 고유명사를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장본인이다. 80년대까지 한복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거의 알지 못하는 복식문화였다.

 

이영희 디자이너가 국제 패션쇼를 시작했던 80년대, 대부분의 외국 디자이너들은 한복을 일본 기모노의 한 종류쯤으로 알았다 한다. 자신은 1986년의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 패션쇼’를 통해 국제적 명사가 됐지만 한복은 여전히 변방의 문화였고, 자신은 ‘기모노 디자이너’로 소개되는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1996년 프랑스 뤽상부르그 궁 오랑제리의 ‘한복:바람의 옷’ 전시회에서 사진작가 김중만이 이 디자이너의 작품을 큰 현수막으로 게시한 것에 세계인이 매료됐고, 이후 한복은 기모노와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복식으로 세계인에게 인식됐다.

 

이후 뉴욕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요청으로 한복을 기증해 100년간 전시될 수 있게 하고, 맨하탄 한복판에 이영희 한국박물관(Leeyounghee Korean Museum)을 개장해 연 2차례씩 미국 내 주요인사를 초청해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등 전 세계에 한국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문화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난 2005년에는 우리나라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모인 21개국의 각국 정상들에게 한복 두루마기를 입혀 전 세계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이영희 디자이너의 이력과 활동은 지면에 다 포함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디자이너는 최근 자신의 삶과 한복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파리로 간 한복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자서전은 이 디자이너의 다양한 경력을 소개해 주면서 한복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오는 11월 3일 오후 6시 청담 반얀트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다. 기념회는 갈라쇼와 장사익의 미니공연도 이어질 예정이다. 아직까지 4,5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운 피부를 간직한 이 디자이너. 그러나 7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뉴욕, 파리, 서울을 오가며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있는 우리 복식문화의 최고봉 이영희 디자이너를 만나봤다.

 

오늘날 이영희라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한복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는 만석꾼 집안의 며느리였다. 당시 부유한 집안이 으레 그랬듯이 집안에는 어머니 말고도 작은 어머니가 두 분이나 더 계셨다. 세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가족의 옷은 모두 어머니가 맡아 지으셨다. 침모도 있었으나 가족의 옷은 침모에게 맡기지 않고 모두 어머니가 직접 맡아 했다.

 

다른 바느질과 달리 가족이 입을 옷을 짓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였다. 옷감을 짜고, 마르고, 물을 들이고, 바느질을 하면서 집안 식구의 몸이 나고 축나는 것을 모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옷에 대한 특별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어릴 적부터 옷감과 색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사진설명>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21개국 정상들이 이영희 디자이너가 제작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설명> 신세계 한국총판 런칭 1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아르마니(Giorgio Armani)와 자리를 함께 했다.

 

<사진설명> 힐러리(Hillery Cilinton) 미국상원의원과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각별한 교분을 자랑한다. 맨해튼의 이영희 박물관은 미국 주요인사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문이 되고 있다. 힐러리 의원은 160㎡ 크기의 한복 전시장을 둘러보고 “의상과 자수가 너무 아름답다”며 “한국인이 한국의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기증된 한복. 이 전시는 향후 100년간 이어질 예정이다.


결혼 후 사촌 언니가 명주실을 뽑고 솜과 옷감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하는 것을 거들다가 어릴 적 옷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고,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 옷을 짓기 시작한 것이 입문의 계기가 됐다.
이후 80년대 초에 만난 고 석주선 선생님은 나의 작품에 일대 전환기가 되는 큰 충격이었다. 평생을 우리나라 고유복식문화의 연구에 바친 선생이 수집한 복식 관련자료는 8000여점, 한복은 4000여점이 넘는다. 이 유산은 모두 단국대에 기증됐다. 선생으로부터 우리 복식의 형태와 색,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아버지로부터는 해외에서 개최된 패션쇼와 같은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고 소화해 내는 끼와 재능을 전수받은 듯하다.


생각해 보면 ‘이영희’라는 나무는 어머니로부터 복식문화라는 토양을, 고 석주선 선생님으로부터는 토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자양을, 아버지로부터는 멋지고 돋보이게 하는 햇빛을 부여 받은 게 아닌가 싶다.

 

2005년 11월에 열린 부산 APEC 정상회담에서 21개국 정상들이 착용한 한복 두루마기를 제작했는데 당시 디자인의 컨셉과 제작의 주안점은 무엇이었습니까?
2005년의 APEC 정상회담은 내 작품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정삼회담에서 각국 정상이 입을 두루마기 제작을 위해 꼬박 일년을 공들여야 했다. 단지 양복 치수 하나만 받아서 신체적 특징에 대한 정보 없이 옷을 만드는 것은 사막에서 모래 하나로 집을 지으라는 얘기와 같다. 더구나 각국 정상의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했다.


두루마기 고름은 부착형으로 만들었다. 외국의 정상들이 옷고름 매는 것을 알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복의 특성을 어떻게 알릴까에 대한 문제에 깊은 갈등을 했다. 외국에서 패션쇼를 진행하다보면 우리와 문화차이가 많은 그들은 “한복은 이야기를 전해준다”라고 느낌을 전하곤 했다.

 

부산의 회의장을 몇 번 답사를 하고 그 풍광에 어울릴만한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 고민했다. 그 결과 회의장의 주변 풍광에 걸맞는 색을 찾아냈다. 두루마기에는 외국인이 느끼는 바 ‘메시지’를 담기 위해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을 주로 넣었다. 부산의 바람과 파도, 황토와 소나무가 어울린 각국 정상의 두루마기는 우리 한복이 자연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정말 잘 드러내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국의 복식에 비해 본다면 한복의 우수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요?
한복은 ‘바람의 옷’이다.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답다. 서양의 복식은 정지 상태에서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반면 한복은 바람 속에서 하늘거리는 아름다움이 단연 압권이다. 바람에 흔들이는 옷고름이나, 치마의 하늘거림.

 

그 미세한 떨림의 미학은 다른 어떤 복식문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만의 것이다. 그리고 한복은 얇은 여러 개의 옷을 겹쳐 입는 형식을 취한다. 옷이 겹치고 면과 선이 만나서 뿜어내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한복은 단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각각의 옷이 어우러져 드러나는 총체적인 멋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꺼운 옷 하나를 입는 것보다 여러 개의 얇은 옷을 겹쳐 입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고 알려져 있다. 온돌 문화에 맞춰 펑퍼짐한 치마와 넓은 바지라는 형태를 만든 우리 한복은 과학적이고도 아름다움을 살린 우리 문화의 중요한 지적 재산이다.

 

불교와 선 사상에서 주로 디자인의 모티브를 얻는다고 들었는데요. 불교가 선생님의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을 소개해 주십시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절에 다닌 기억이 매우 특별하다. 작품을 구상할 때 절에 가서 생각을 하면 가장 잘 떠오른다. 우리나라의 사계절은 어디에 가도 풍성한 색을 자랑하지만, 절에서의 사계는 무수한 색의 향연이다.

 

봄철 소나무 새순의 파릇함과 진달래, 여름의 시원한 물빛과 푸르름, 가을의 오색만발한 산 풍경, 겨울의 새하얀 눈과 기와의 극명한 색의 조화. 이루 말할 수 없이 풍부한 색과 자연스러운 형태들이 곳곳에서 나에게 손짓을 한다. 절에서 배운 천연 염색의 색감은 원색에 지쳐있는 눈을 편안하게 감싸주기에 충분했다.


파리컬렉션에서 처음 만난 ‘르몽드’(Le Monde)지의 로랑스 베나임이라는 기자는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한국에까지 와서 인터뷰를 했다. 서울의 커피숍에서 해도 될 인터뷰를 기자는 굳이 절에 가서 해야 한다며 고집해 화엄사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한복이 세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이뤄 온 성과만으로도 꿈이 또 있느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작은 길을 만들고, 불씨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한복이 세계적인 명품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루이비통이나 샤넬과 같은 명품 브랜드가 한복이라고 탄생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한복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도 격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우리의 복식문화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관심이다. 일본이 기모노를 세계화 하기 위해 전 국민이 똘똘 뭉쳐 인지도를 높였듯이 세계적인 명품의 탄생은 어느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2004년 혼자 힘으로 맨해튼에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미국 주요 인사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렸다. 그러나 우리 문화를 저들에게 알리는 것은 한 두 사람의 패션쇼와 이벤트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수년 동안 전략을 세워 꾸준히 밀어야 한다. 우리 문화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공감을 형성해야 한다. 루이비통은 150년간 5대에 걸쳐 일궈 온 문화 아이콘이다. 모든 프랑스 국민이 루이비통을 사랑한다. 그러나 한복은 오히려 외국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외면 받는다. 문화란 관심 속에서 자라는 나무다. 그 나무를 크고 멋지게 성장시키는 것은 몇몇의 노력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애정일 것이다.


멀다고 바라만 본다면 영원히 들을 가로질러 갈 수 없다. 좁고, 거친 길이나마 지금 나는 길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 그 길은 내가 걸어갈 것이고, 후대의 수많은 사람이 걸을 것이다. 그 길이 사람들의 발길로 넓어지고 반듯하게 뻗어 꽃과 돌로 단장되고, 사람과 마을을 잇는 길이 되기를 바란다.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