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대한노인회 회장상
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대한노인회 회장상
  • 관리자
  • 승인 2008.11.1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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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윤 경남외국어고등학교 2년

10월 효행의 달을 맞이해 본지와 (주)백산이 주관하고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한 ‘효행수기 공모전이 성황리에 마감했습니다. 학생부(초겵?고) 264편, 일반부(대학생겮봉? 92편 등 총 358편이 치열하게 경합한 끝에 경남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남혜윤(사진) 학생이 영예의 학생부 대한노인회 회장상으로 선정됐습니다. 본지는 총 7회에 걸쳐 수상작을 게재합니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따뜻한 효행이 넘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 작은 행복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었을 때 우리 엄마가 내게 매일 빠지지 않고 마치 칭찬인 양 해주셨던 말, “아이고, 참말로! 말 지지리도 안 듣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쓸데없는 인생에 대한 고뇌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내게, 그 당시 엄마라는 존재는 그저 밥을 해주는 사람 정도에 불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언제나 맞벌이로 바쁘셨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 풀이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런 엄마가 내 눈에 다정하고 따스한, 이상적인 어머니 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엄마의 눈에 트집 잡힐만한 일이 생기면(가령 화장실 슬리퍼를 엉망으로 벗어뒀다거나) 엄마의 대포알 잔소리는 10~20분씩 지속되어 땡볕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일보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고, 조금이라도 그런 고통을 피해보려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막는 순간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극에 달했다.

 

“그 손 안 내릴래!” 언제나 그런 식의 짜증으로 끝나는 매일의 레파토리에 나는 정말로 지겨워져서, 나중에는 거의 엄마랑 원수지간으로 되어 거의 말을 나누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가 무려 10년 전이다.


10년 동안 일어난 변화를 일일이 다 나열하자면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막 고학년으로 넘어갈 무렵,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했다. 엄마는 내게 “니 엄마 따라 올거제?” 라고 했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게 되어 아빠의 곁에 남게 되었다.

 

하루하루 잔소리와 말대꾸로 이어져온 관계였음에도 나를 낳아주신 엄마인 탓에, 보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매일 엄마가 보고 싶다고 일기장에 노래를 불러댔다. 전에는 엄마 욕으로 가득 차 있었던 일기장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엄마와 아빠는 재결합했다. 다시 재결합을 논하기 위해 만났던 그 때, 엄마와 몇 달 만에 눈을 마주하던 그 때, 엄마는 내가 많이 불쌍해 보이셨는지 눈물을 그치실 줄을 몰랐다. (나중에 엄마한테 그 때의 내가 어땠냐고 물었더니, 때가 꼬질꼬질해서 정말 엄마 없는 아이 같았다고 얘기해 주셨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전보다 살이 무척 많이 빠져서 안 그래도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 더 강조되어 흡사 아픈 사람 같았다. 살이 빠져 가늘어진 엄마의 목에 이상하게도 어느 한 부분이 매우 튀어나와 있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으며 가족 유대가 단단해졌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렇듯 권태란 있는 법이다. 엄마와 나는 다시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똑똑한 아이의 엄마이고 싶어 했다. 내가 수학시험에서 50점을 받아왔을 때 엄마는 날 내쫓기라도 할 기색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 때 나는 엉엉 울면서 방문을 쾅 닫아 잠그고 궁상맞게도 화나는 마음을 일기장에 풀어 내렸다. “엄마가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난 주워온 아이인 건가. 성적이 나쁜 아이는 자신의 딸도 아닌가.” 물론, 그 당시엔 엄마의 속 깊은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힘든 일을 겪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정신이 조금 더 성숙했을 뿐 그래봤자 어린애. 맞벌이를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엄마의 내가 잘 돼서 편히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가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때 그 일로 나는 깨달은 게 있었다.

 

 엄마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면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된다는 것. 그걸로 아줌마 집단 사이에서 엄마가 우위에 올라서게 되고,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엄마가 콧구멍을 흥분으로 벌렁거리시며 “아, 글쎄 혜윤이가 말이야~” 라고 말하시게 된다는 것. 그렇게 조금씩, 학년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우호적인 사이가 되는 방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엄마는 자주 우울증을 호소하셨다. 자꾸 무기력해지신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수퍼우먼과도 같이 여겨져 왔던 사람이라서(그도 그럴 것이 아빠도 못 들던 물건을 엄마는 번쩍번쩍 들고, 대한민국 아줌마 특유의 근성을 단단히 갖추고 계신 우리 엄마셨으니까) 그런 호소는 내게 짜증을 유발할 뿐이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우울증이란 말인가. 나야말로 입시스트레스로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건성으로 그 말들을 흘려들으면서 점점 눈에 띄게 피곤해하고, 신경질적이게 되는 엄마를 무시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했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기 까지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거의 평생을 살아왔던 대구를 뒤로 한 채 부산으로 이사 왔다. 매우 오래된 주공 15평짜리 아파트. 네 명의 가족이 살기엔 좀 비좁은 듯싶은 그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서, 나는 우리 가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전학을 가려면 교복을 새로 사야하는데, 그 교복 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내비치는 엄마를 보면서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난 우리 집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 체면이 중요했고, 부끄러움 때문에 도저히 촌스러운 예전 학교 교복을 입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새 교복을 사야한다고 울먹이는 내 앞에서 엄마는 한 숨을 쉬며 20만원 짜리 새 교복을 내게 안겨주셨다. 죄책감이 조금 들었지만, 내가 새 교복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에 엄마도 좋으셨는지 같이 웃으셨고 나는 그 일을 금세 잊고 말았다.


새 교복에 좋았던 것도 잠시. 이사 온 후 언제나 국가 기밀이라도 이야기 하듯 어두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시던 부모님이 날 부르셨다. 그리곤, 엄마가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할 어떤 일이 있으며 그 일을 하기 위해 한 달 간 집에 없을 거라고 하셨다.

 

공부하기도 힘든 때에 집안 상황의 악화도 겹쳐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며, 한 달간 음식은 이모가 잠깐잠깐 와서 해주실 거라고 하셨다. 언제나 나 자신뿐인, 이기적인 나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모가 와주신다니 달라지는 건 없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간단하게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며 더 이상 우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그걸로 끝내고 말았다.

 


엄마가 약속한 한 달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밤 12시가 거의 다 된 시각에 집으로 이모가 찾아왔다. 그리곤 ‘뭐라꼬, 니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라며 다짜고짜 날 어디론가 끌고 가셨다. 그곳이 바로, 부산의 침례병원이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병원 안은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라도 떠도는 양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이런 곳에 엄마가 있다니.

 

나는 엄마가 보험회사에서 하는 연수라도 간 줄 알았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교복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의 어두운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내가 끔찍한 불효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무게를 더했다. 그리고, 불이 꺼진 병실 안에서 엄마가 링거를 끌면서 아빠와 함께 나왔다. 병원 환자복을 입은, 처음으로 보는 건강하지 않은 모습의 엄마였다.


그제서야 나는, 점점 부어오르던 엄마의 목을 이해했다. 그건 갑상선 암이었다. 호르몬 조절이 되지 않아 언제나 체온이 오락가락 변하고 우울증을 동반하는 병. 계속 엄마를 피곤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병. 엄마의 목에는 그 갑상선 암을 잘라낸 흔적으로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유방암. 엄마에게는 유방암도 있었던 거다. 엄마의 한쪽 가슴이 휑했다. 그리고 나도 갑자기 한기가 몰아쳐 사막 한 복판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멍 했다.


엄마는 네가 여기 왜 왔냐며 말하시면서도 기쁜 듯 웃으셨다. 머리가 떡이 져 있었는데, 항암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머리를 감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항암치료 같은 건 텔레비전 신파 드라마에나 나오는 소재 인줄 알았는데. 점점 내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가슴 아파 하실까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내가 울면 진짜 신파 드라마가 되버린다. 정말로 엄마가 아픈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울면 안 된다.


아빠와 함께 병원을 나서며, 나는 엄마의 병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침례병원의 의사 중 한사람을 친척에게 소개받아 치료받기 위해 이사까지 왔으며, 감당할 수 없는 수술  비용에 기초 수급 대상자까지 되어있음을.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 가족의 호적에는 아빠의 이름이 지워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걱정할까봐 그런 모든 사실들을 숨기고 일을 진행해온 것이다.


아빠에게 왜 나한텐 숨겼냐고 화를 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한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는데. 집안일도 하나도 안 도와드리고 내 할 일만 했는데. 그러자 아빠는 말하셨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내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엄마는 기뻐서 금방 건강을 회복하실 거라고.


얼마 되지 않아 퇴원을 하신 엄마는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다. 아주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피곤해서 손도 까딱 하실 수 없는 듯 했다. 그때부터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집에 오면 손도 까딱 안하던 건방진 딸에서 뭐든 척척 알아서 하는 만능 딸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설거지, 방청소, 화장실 청소……. 세상에, 엄마가 이런 일들을 모두 여태 혼자서 해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드라마를 방송할 시간쯤이면 나는 누워 있는 엄마 곁으로 가 안마를 시작한다. 이제 8살 된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과 함께 엄마의 팔, 다리를 주무르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와 인터넷에서 본 유머를 이야기 한다. 드라마의 악역에 대한 욕도 잠깐잠깐 곁들이면서. 그래, 엄마가 아프지 않고 건강했던 예전처럼 말이다.


엄마가 조금씩 건강해지시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걷기 운동도 조금씩 하기로 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는 마트까지 오가기. 나는 거의 짐꾼의 자격으로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힘이 별로 없다는 것이 짜증이 났다. 팔 힘이 없는 엄마가 미안해 할까봐 앞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마트에 한번 갔다 온 다음날은 근육통 때문에 노트 필기를 하기가 힘들만큼 팔이 욱신거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도 엄마가 다시 건강을 회복해 건강해진 몸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깟 필기가 대수란 말인가.


하늘이 내게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걸까. 어려운 외고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엄마에겐 계속 말씀드리지 않고 있다가 입학 오리엔테이션 날이 다가오자 그제야 말씀을 드렸다. 엄마는 마치 내가 전국의 모든 수재를 물리치고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하여 웃으시며 기뻐하셨다. 게다가, 마침 응모했던 백일장에서 은상을 받아 상금을 30만원이나 받게 되자 엄마의 입은 거의 찢어지실 지경이었다.

 

아마 나의 존재는, 우리 엄마의 친구 분들에게 깊게 각인 되어있을 것이다. 엄마가 내가 이룬 일(?)에 대해 한분 당 30번씩은 이야기 하셨을 테니까. 아마 난 그분들의 자식들에게 엄친딸(엄마친구 딸)로 기억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행복한 이유는 내가 해낸 일들 때문이 아니다. 그 일로 인해서 엄마가 기뻐하셨으며, 정말로 건강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성공적인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에 엄마도 용기를 얻으셨는지 무기력함을 터시고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하고 계신다. 최근엔 기숙사 생활 때문에 잘하면 일주일에 한번 보는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더욱더 기쁘게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몇 번씩 꼭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고, 집에 갈 때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안마를 해드린다. 이런 일들은 내게 공부 시간을 뺏거나, 귀찮은 일이 아닌 내 행복의 작은 일부분을 차지해가고 있다. 어릴 적엔 엄마랑 싸우기만 했고, 얼마 전까진 엄마를 힘들게만 하는 불효녀였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은, 이제야 비로소 얻은 작은 행복을 나는 다신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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