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일반부 대한노인회 회장상
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일반부 대한노인회 회장상
  • 관리자
  • 승인 2008.11.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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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현 서울 동작구

10월 효행의 달을 맞이해 본지와 (주)백산이 주관하고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한 ‘효행수기 공모전이 성황리에 마감했습니다. 학생부(초˙중˙고) 264편, 일반부(대학생˙성인)92편 등 총 358편이 치열하게 경합한 끝에 서울 동작구 송광현씨(사진)가 영예의 일반부 대한노인회 회장상으로 선정됐습니다. 본지는 총 7회에 걸쳐 수상작을 게재합니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따뜻한 효행이 넘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감나무 연가

 

일기예보는 또 틀렸다. 화창한 날씨가 며칠 동안 이어질 거라고 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가까운 건물 입구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나뭇잎이 파르르 떨리면 비가 꽤 많이 내릴 징조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하늘은 여전히 어둑어둑하고,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바지주머니에 넣고, 겉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바지 밑단은 축축해졌고, 신발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겉옷 역시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숨이 차올라 나는 뜀박질을 멈췄다.

 

어차피 다 젖었는데 뭘, 될 대로 되란 생각으로 나는 천천히 집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는 날엔 반 지하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집 구석구석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언제 쯤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동네에서 유일하게 마당이 있는 이층집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가지를 담벼락 밖으로 내밀고 있는 감나무 밑으로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떨어진 덜 익은 감 몇 알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뒹굴다 갈라진 틈으로 붉은 속살을 내비친 덜 익은 감. 덜 익은 감을 보면서 나는 외갓집을 떠올렸다.
 
시골이 아닌 작은 지방도시에 있었던 외갓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마당은 집보다 훨씬 넓은 크기로 펼쳐져 있었고, 집 구조는 양옥구조 보다는 한옥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집 맨 끝 쪽에 배치돼서 마당과 작은 쪽문을 통해 연결돼 있는 부엌, 마당을 끼고 돌아가야 있던 화장실, 그리고 할머니에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던 마당 곳곳에 심어진 채소와 나무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살면서 봐 왔던 어느 집보다도 자연스런 멋이 있던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처럼 현대적인 멋스러움은 없었지만, 기와지붕 밑으로 기둥과 마루가 고풍스러운 집. 마당에 수영장은 없었지만, 각종 채소와 나무들이 아기자기하게 심어져 있던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집이었다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특히 할머니 곁을 일찍 떠난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꽤 오랜 세월을 할머니 곁에 있어 준 마당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자, 삶이었던 것이다. 그 마당에서 할머니에게 가장 애틋했던 건 바로 감나무였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외삼촌은 마당에 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감나무의 모습은 이미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린 후였다. 늦여름부터 할머니는 감이 열린 자리마다 점을 찍어뒀다. 외삼촌 집으로 보낼 감부터 첫 째 딸에게 보낼 감, 작은 딸에게 보낼 감, 막내딸에게 보낼 감까지, 그리고 내가 외갓집에 가면 따다 줄 감 역시 미리 찍어 둔 것이다.

 

그 시절엔 아직 떫은맛이 남아있는 감을 내 입 속에 넣어주는 할머니가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감을 뱉어내고는 억지로 구역질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 말 없이 내가 뱉어낸 감을 다시 주워 먹던 할머니의 입가가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내 눈에는 선하다. 그리고 감나무 밑에서 감을 올려다보던 할머니의 뒷모습 또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그 감나무는 친구이자, 동반자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던 감나무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뿌리를 드러냈다. 아버지가 회사를 잃었고, 외삼촌과 이모들은 돈을 잃었고, 어머니는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건축사무실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물려 줄 유산과 함께 집을 팔았던 것이다. 집과 마당을 잃게 된 할머니가 마음도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교도소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할머니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 때부터는 안방을 할머니와 내 방으로 바꿨고, 자신은 작은 방을 쓰게 됐다. 그 때부터 나는 꽤 오랜 시간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어머니는 낮에는 파출부 일을 나갔고, 밤에는 할머니의 바느질 부업을 함께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바늘귀에 실을 꿰려면 한참 걸리는 할머니였지만, 현란하면서도 정확한 바느질 솜씨 앞에선 어머니의 바느질은 어린 내 눈에 어설퍼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파출부에서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고, 다시 빨래공장으로 일터를 잡기까지 꼭 8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지방에 내려가 일을 시작해서 달마다 생활비를 송금해 왔다.

 

할머니는 바느질 부업을 특별한 일이 없을 때 말고는 끊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지독하리만큼 일을 계속 했다. 그렇게 나는 고3 수험생이 됐고,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머니를 호강시켜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당부했다. 가끔 공중전화로 안부를 전해오는 아버지가 걱정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형편이 어렵다는 것 말고는 나는 감히 그래도 그 때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생은 산 넘어 산이란 말을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날씨가 유난히 따스하던 봄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서부터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실수치고는 너무 자주 밥을 태우는 옆 집 진옥이네 아줌마의 소행이려니,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더운 열기가 밖으로 밀려나왔다. 문 앞에서 바로 보이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할머니에 양은냄비가 검게 타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불을 끄고 밸브를 잠근 후에 할머니를 부르면서 창문과 문을 활짝 열었다. 대답이 없었지만, 방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TV앞으로 고개를 쭉 내밀어, 연속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밀치고 주방 쪽으로 달려 나갔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화가 나서 할머니한테 가스레인지를 만지지 말라고 쏘아부친 후에,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머니도 내 얘기를 듣고는 크게 화를 냈다. 가스레인지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자칫 위험했을지 모를 상황에 스스로 몸서리가 쳐 지는 듯 했다. 할머니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바느질을 하고 난 후에 나오는 실 뭉치와 천 찌꺼기를 넣었을 때도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조곤 조곤 설명을 했다.

 

할머니가 신문배달 신청 가판대에서 신청을 약속하고, 에어컨선풍기를 받아왔을 때도 어머니는 할머니를 타일렀다. 동네 가게에서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외상을 할머니가 자주 했단 사실을 알았을 때도, 할머니를 달가워하지 않는 외숙모에게 김장을 해 준다며 배추 50포기를 야채가게에서 배달을 시켰을 때도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효녀라고 생각했으나, 그 날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펄펄 뛰면서 화를 내는 모습을 본 후엔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효녀는 아니란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까지도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별다른 얘기를 건네지 않았고, 바느질 부업거리를 더 이상 받아오지도 않았다. 일을 끝낸 후에 집에 들어와서는 나에게만 할머니랑 같이 밥을 먹으란 얘기만 건넸을 뿐, 바로 잠을 자고 이른 아침 출근을 했다.

 

그런데 그 주말에 할머니가 어딘가 이상하단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평소엔 멀쩡히 있다가도 갑자기 자는 도중에 허공에 대고, 누군가랑 즐겁게 대화를 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을 벗어 접어서 서랍 안에 넣어두는가 하면, 내 교복을 가위로 자르는 행동까지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급히 알렸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 하는 할머니를 붙잡고 어머니는 오랜 시간동안 엎드려 울었다. 그랬다. 연속극 속에서 치매연기를 리얼하게 펼치는 중견연기자를 보면서 혀를 차던 우리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이었다. 소식을 듣고 밤늦게 우리 집에 찾아 온 외삼촌은 이렇게 늦게 치매가 찾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어머니를 위안했다.

 

그런데 그 날 외삼촌을 보고 나서부터 할머니는 상태가 악화됐다. 기억이 왔다 갔다 했던 할머니가 아예 예전의 모습을 잃은 것이었다. 아들네 집으로 가겠단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밥도 먹지 않았고, 숟가락을 던져버리고, 밥상을 발로 차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할머니를 끝까지 자신이 모시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일을 나가지 않았고, 내가 오는 시간에 시작할 수 있는 야간에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돈 버는 일을 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실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외삼촌은 할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얘기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울면서 같이 살자고 몇 번이고 애원해 봤지만, 이미 예전의 눈매와 표정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짐을 챙기며, 외삼촌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할 뿐이었다.

 

외삼촌 집으로 간 할머니가 걱정돼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외삼촌과 외숙모와 번갈아 통화를 했고, 매주 주말에 할머니를 찾아갔다. 정신과 전문의로 있는 외삼촌 친구를 찾아가도 소용이 없는 할머니의 상태를 보면서, 어머니와 나는 몰래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지도 어느새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 나는 할머니가 새가 되어서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차마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떠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조차 흘리기 부끄러운 자신을 매섭게 꾸짖으며 돌아앉아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친구처럼 동반자처럼 가꿔온 삶의 터전이 고스란히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던 날, 할머니가 자식들 몰래 감당했을 서운함과 서러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말고는 여전히 부모님은 돈 버는 일에 매진하고 있고, 나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할머니를 떠나보냈지만, 마음으로는 절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두런두런 어머니와 할머니 얘기를 하곤 한다. 치매 걸린 노모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사람들의 얘기가 전파를 탈 때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신다. 하지만 자식의 입장으로 생각해 본다.

 

어디선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단 생각으로 할머니 산소에서 눈물을 보였던 아버지를 할머니도 조금은 용서하지 않으셨을까. 길거리를 갈 때마다 마주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괜히 할머니 생각에 기분이 씁쓸해진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할머니가 탔을 때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것으로나마 할머니께 못 다한 효도를 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디선가 우리 가족을 지켜보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야한단 생각을 한다. 내가 성공해야 사랑하는 어머니께 효도다운 효도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이나마 덜 후회하기 위해서, 아니 자식 된 도리로써 그것은 어쩌면 숭고한 삶의 연속이다. 오늘따라 외갓집 마당의 감나무가 떠오른다. 돌아오는 할머니 기일엔 잘 익은 홍시를 내가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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