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인을 찾아서 26 - 주병현(100) 어르신
100세인을 찾아서 26 - 주병현(100) 어르신
  • 관리자
  • 승인 2008.11.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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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수양딸과 운명적 만남 ‘아름다운 동거’

‘파란만장 드라마 같은’ 100년의 삶
 문을선씨 지극 정성 봉양이 큰 힘돼
 둘 다 병들어 살길막막해 지원 절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파란의 역사를 헤쳐 온 지긋한 연배의 어르신들 치고 사연 없는 분들이 있을까. 그러나 주병현(100) 어르신처럼 기구한 사연은 흔치 않을 듯 하다.
주병현 어르신은 1908년 황해도 장연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대부터 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면에서 제일가는 부자였기에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계의 몰락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해방 이후 북한정권은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모든 땅과 재산을 몰수당했다. 부모님은 끝내 고향 땅에서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모두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다.


주 어르신도 전쟁 중에는 산에서 살다시피 하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고, 결국은 틈을 보아 섣달의 서릿발 내리는 추위 속에 부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룻배 한척에 의지해 노를 저어 백령도로 도망나왔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난 피난민의 생활이었지만 백령도의 생활은 할 만했다. 주 어르신은 백령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석유 등의 전시물자를 거래해 꽤 큰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다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은 모두 다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주 어르신도 해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사진설명> 어려운 삶 속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주병현(100겳으Β? 어르신과 문을선(60)씨.

 

그러나 목포에서 그만 사기를 당해 백령도에서 모았던 꽤 많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다시 궁핍한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다. 치열했던 전쟁 초기의 일진일퇴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전선의 고착으로 이어졌고, 주 어르신은 다시 백령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만 오랜 전쟁에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아내는 백령도에서 중풍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다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일군 주 어르신은 안양으로 이주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도 꽤 큰 집을 마련할 정도의 재산을 모아 대지 75평에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사위가 일본에 김을 수출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집을 팔아 사업자금을 댔으나 물건을 마련하고 선적하려는 하루 전날 일본의 수출길이 모조리 막혀버리고 말았다. 모든 재산을 또 다시 날린 주 어르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다.


길가의 허름한 점방을 얻어 복덕방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혼자 살던 주 어르신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 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병색이 완연한 한 중년의 여인이 방값으로는 턱없는 돈을 들고서 방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이후 어르신의 수양딸 노릇을 하게 된 문을선(60)씨였다. 방값에 맞는 방을 구해줄 수 없었던 주 어르신은 복덕방에 딸린 방을 내주고, 일을 해서 돈이 마련되면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병세는 악화됐고, 딱하게 여긴 주 어르신은 쌀이며 연탄을 들여주며 문씨가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문씨는 이날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후에 주 어르신의 복덕방이 헐리자 90대 가까이 된 주 어르신을 모시며 수발을 들었다. 자신도 병든 몸이었으나 고령의 노인이 혼자 취사를 하며 생활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문씨는 젊어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이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젊어서 자궁적출 수술을 하는 등 몸도 아팠지만, 이후 결혼생활에 질려 다시 재혼 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주 어르신을 봉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40대 중반의 여인이 80대를 훌쩍 넘긴 어르신을 모시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보듬으며 의지가 된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만남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두 사람 다 몸에 심각한 병을 안고 있는데다가 일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소득이 전무한 이 가계를 꾸려가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로 보였다. 주 어르신은 아들이 있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데다 몸이 아파 어르신을 봉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대상이 되지 못해 수당을 받지 못하며, 어르신을 봉양하는 문씨는 어르신의 후견인 자격으로 기초생활수급액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비공식적인 통로로 지원받고 있을 따름이다. 어르신의 집은 대들보가 무너지고 비가 새는 등 안전 문제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수도관이 어디서 새는 지 알지 못해 물도 한 번에 받아 놓고 써야만 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집 주인은 안전에 문제가 있다며 다른 곳으로 이주하길 권고하지만, 당장 빌려서 마련한 전세금의 이자를 물어야 하는 형편에서 이주할 곳은 마땅치 않다. 집에 대한 수리도 전혀 이뤄지지 않아 100세의 주 어르신이 지붕에 올라가는 것을 보다 못해 지병을 앓고 있는 문씨가 올라가 비 새는 것을 막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동행은 경제적인 이유로 심각한 좌초 위기를 겪고 있다. 동사무소와 각종 지원단체에서 쌀이며 연탄이며 부식 등을 지원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형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 어르신은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는 부자 되는 거지”라는 답변으로 현재 생활의 곤궁함을 표현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 어르신의 가계와 같은 상황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그 제도의 취지를 망각하는 일로 보인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이 걱정인 어르신에게 장수 식단을 묻는 것 자체가 외람된 일이었다. 주 어르신은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라고 답했다. 특별히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잠도 건강을 지키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같이 몸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으로 뒤척이다보면 날이 훤하게 새기 일쑤고 하루 평균 3~4시간 정도 주무신다고 한다.


3년 전. 생활고에 사는 일이 너무 고달파 문씨라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에 살충제를 사와 음독하려 했던 주병현 어르신. 결국 집안 청소를 하던 문씨에게 약병이 발각 돼 실컷 울었다던 말씀을 하시던 주 어르신은 결국 오열을 참지 못했다.


100세라는 영광된 수명을 기록했지만,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주 어르신의 삶에 최대한 빨리 지원이 도달해 활짝 웃는 아름다운 동행이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배려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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