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학생부 백세시대 회장상
효행수기 공모전 당선작 학생부 백세시대 회장상
  • 관리자
  • 승인 2008.11.2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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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 안양외국어고등학교 2년

10월 효행의 달을 맞이해 본지와 (주)백산이 주관하고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한 ‘효행수기 공모전이 성황리에 마감했습니다. 학생부(초˙중˙고) 264편, 일반부(대학생˙일반) 92편 등 총 358편이 치열하게 경합한 끝에 경기도 안양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최은지 학생(사진)이 영예의 학생부 백세시대 회장상으로 선정됐습니다. 본지는 총 7회에 걸쳐 수상작을 게재합니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따뜻한 효행이 넘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따뜻했던 지난 겨울

 

내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암에 걸리셨다. 유방암이었다. 다행히 말기는 아니었지만 조기 예방을 하지 못한 관계로 결국 가슴과 림프선을 절단해야 하는 아픔을 겪으셨다.


물론 큰 고비는 넘기셨어도 그 이후로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계속 좋지 않으셨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가슴을 졸이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다.


그러던 지난 겨울, 어머니는 뜻하진 않은 이유로 또다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패혈증 진단이 내려졌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장기간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싼 병원비를 걱정하시며 다 낫지도 않은 아픈 몸을 이끌고 2~3주 만에 조기 퇴원을 하셨고 우리 가족은 어찌할 수 없는 선택에 가슴 아파해야만 했다.


집에 돌아오시고 난 후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셨다. 형편상 가사 혹은 간호 도우미를 둘 수 없었기에 그렇게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가족들이 보살펴야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시느라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고된 생활을 계속 하셔야 했고, 나는 여전히 학기 중이었으며 학교를 그만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남동생은 중학교 2학년으로 아빠도 나도 그 아이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마침 겨울 방학 기간이었기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대로 나는 집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나 하나 찾아 대신해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배려로 공부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는데, 막상 어머니를 대신해서 뭔가를 하려니 막막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18년이란 시간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오면서도 막상 나에게는 ‘나’란 존재만이 중요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에 너무도 무심하고 게을렀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하루하루 이와 같은 생각과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나는 집안에서 혼자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며, 빨래와 청소는 물론 동생을 챙기는 일까지도 잘 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맡고 있는 수많은 역할들 가운데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과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보람도 잠시일 뿐, 생활 곳곳에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등교하는 날마다 매일 엄마가 깨워주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갈 수 있었는데,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혼자 일어나야 하는 것부터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일주일가량 지나고 나니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깨가 쑤시고, 팔에 알이 밴 것은 물론, 빨래와 설거지를 한 손은 점점 부르트고 까칠해지는 것을 바라볼수록 점점 속이 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모든 것들이 다 귀찮게만 느껴졌고, 점점 지쳐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다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 한 몸을 챙기는 일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닌데, 가족 모두의 일상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했던 어머니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어머니의 역할은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하루 하루였다. 그 날도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집으로 행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돌아와서 누워계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고 나는 잠시 그 옆에 앉아 파리하게 야윈 엄마의 두 손을 살짝 잡아보았다. 참 작은 손이었다.


문득 몇 일간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거칠어진 내 손을 보며 속상해하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나와 별 다를 것 없는 그 두 손으로 날 이렇게까지 키워내셨고 지난 세월 동안 온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난 이 순간까지 몰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집안일을 십 수 년 동안 묵묵히 해 온 어머니의 삶을, 가족을 향한 당신의 손길과 사랑을.


며칠 전 일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누워계신 이후 혼자 일어나시지도 못하고 사람이 없을 경우 계속 누워 지내실 수밖에 없었다. 가끔 너무 누워만 있어서 힘들다고 하실 때는 나 또는 동생의 손을 필요로 하셨다. 화장실 가시는 것조차 힘들어 하셨고, 그래서 안방에 요강을 두고 소변을 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소변을 보실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소변을 받아달라고 하셨다. 약해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소변을 받아낸다는 사실이 지저분하고 꺼림칙해 주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잠시 잠깐 망설임 끝에 나는 소변을 받았고 그러는 동안 숱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난 18년 동안 어머니는 나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키워주셨는데,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떠올리며 난 부끄러움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갓난아이 시절 내 대소변도 사랑스런 손길로 다스리신 엄마인데, 이런 상황에서 잠시나마 망설였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소변을 다 받아내자 어머니가 힘겨운 목소리로 고맙다고 하셨다. 왠지 어머니께서 고맙다고 하시니까 더 죄송스러웠다. ‘어머니의 딸로서 당연히 해야 했던 것인데’라는 생각에 한없이 죄송할 뿐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의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다. 아빠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의 사랑과 어머니의 의지로 인해 병세는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불편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로 인해서 나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새롭게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보다는 내가 더 중요했고 가족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모습이 좋은 사람이길 원했던 나에게 가족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 후 내 삶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서는 그날을 소원하며 부끄러운 내 고백을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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