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화양연화(花樣年華)
[디카시 산책] 화양연화(花樣年華)
  • 디카시·글=이기영 시인
  • 승인 2021.09.10 14:19
  • 호수 7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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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슬픈 날들

소화(宵花)가 귀대고 듣는 발자국 소리

영, 영, 오지 않고 

오늘 하루 또 하루가 진다 


옛날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소화는 어느 날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 수청을 들고는 이내 잊혀졌다. 그날 이후로 소화는 행여 임금이 다시 자신을 찾아줄까 매일 담장 아래에 귀를 대고 발자국 소리를 듣다 그만 죽고 만다. 그 담장 아래에 피어난 꽃이 바로 능소화다.

꽃이 진다. 수십 개 꽃봉오리를 염주처럼 묶어놓고 하루 하나씩 모가지를 툭, 끊어버리고 진다. 지는 것도 피는 것도 더 이상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진다. 벌도 나비도 불러들이지 않고 나팔처럼 온 몸이 귀 한 장인 능소화가, 온 몸이 꽃잎 한 장인 능소화가 담장 아래로 뚝, 뚝, 피 토하듯 무너져 내린다.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한 깊은 사연을 묻기라도 하려는 듯이, 담장 아래로 맵고도 쓴 날들이 계속해서 떨어져 쌓인다. 

원망이 아닌 절망으로,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왈칵! 서러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들.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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