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채 어르신의 황혼재혼기 10회
정희채 어르신의 황혼재혼기 10회
  • 함문식 기자
  • 승인 2009.03.20 09:06
  • 호수 1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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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고백

박 여사와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평온했던 삶에는 희열과 고통이 번갈아 찾아왔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나이 60에 맞이하는 ‘사랑’이라니. 박 여사와의 미래에 대해 혼자서 상상하면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지만, 현재 나의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박 여사에게 누구보다도 잘해 줄 자신이 있었지만, 과연 나의 이런 진심만을 가지고 나를 선택해 줄 지 문제였다. 자격지심 때문에 나는 저돌적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어금니를 깨물고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가지 고민에 빠져있던 차에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박 여사 전화였다.

“정 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오시겠습니까?”

“예?”

뜻밖의 제안이었기에 나는 반문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갑자기 무슨 일인데 댁에서….”

“많이 바쁘시다면 그만두어도 되고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닙니다. 모처럼의 초청인데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집의 위치를 묻고 약속을 잡았다. 박 여사는 내일 마침 집에 아무도 없으니 얘기도 나누고 자기 집 구경도 하고 놀다 가시라는 것이었다.

처녀총각 두근거리는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일까. 서울 은평구에서 성남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몇 번이고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가는 그 길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리고,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만지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박 여사의 집으로 향했다. 물론 가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집에까지 초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신호가 아닐까?’

박 여사는 시장 앞에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박 여사와 함께 시장에 들러 둘이서 먹을 과일 몇 가지를 사들고 박 여사의 뒤를 따르니 그 기분은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고 보니 웬 젊은 여인이 아이를 업은 채 마루에 서있지 않은가. 박 여사는 당황하면서 며느리라고 소개했다. 아침에 일이 있어 친정에 갔었는데 박 여사가 마중을 나온 사이 일이 잘못돼 바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입장이 매우 난처한 듯 보였다.

나는 짐짓 호쾌하게 웃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마침 며느리도 성정이 따뜻해 보였다. 며느리의 인사를 받고 박 여사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뒤에 며느리는 과일이며 포도주를 올린 주안상까지 봐 주었다.

박 여사는 시종 거북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아무래도 며느리가 있는 가운데 외간남자와 방에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나는 한 가지 꾀가 났다. 오히려 이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나에게 아주 좋은 상황이 만들어 질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뭉스런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더욱 과장되게 박 여사와의 친밀함을 표현했다. 며느리가 장차 시아버님 되실 분이 집에 다녀가셨다는 소문을 가족들에게 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박 여사의 며느리도 역시 내가 그렇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술잔이 한두 잔 오고가면서 온몸에 취기가 들더니 온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싶었다.

박 여사도 체념한 듯이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자꾸 채근하자 박 여사는 나를 초청한 것엔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 버려야 한다. 며느리까지 알게 된 마당에 결코 어물쩍 넘겨버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호간에 피할 수 없는 마음의 결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의 탓에 용기백배했다. 세상은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 부른다. 사랑의 ‘운명’이란 놈은 나에게 한참 지각해 찾아 왔지만 나는 절대로 이놈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소에는 여자들 앞에서 한없이 수줍었던 나였다. 술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박 여사를 확 껴안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뜻밖에도 거부감 없이 순순히 응해 주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입술까지도 내밀어 보았다. 역시 허락해 주는 것이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비록 인생 황혼길에 서있지만 이성간의 진실한 애정이 무엇이고 참다운 연애가 무엇인지도 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것이다. 우리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됐다. 때론 백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무엇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얼떨떨한 하루를 마치고 박 여사와 장차 며느리가 될 여인의 환송을 받으며 성남을 떠났다.

정리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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