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김창환 대한민국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
[인물포커스] 김창환 대한민국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
  • 장한형 기자
  • 승인 2009.05.15 12:41
  • 호수 1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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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높은 토론문화 꽃피워 국가원로단체 역할 다할 것

대한민국 헌정회(憲政會)가 4월 10일 2009년도 제3차 운영위원회를 개최, 의장에 김창환(金昌煥·74, 제8·9대 국회의원) 위원을 사상 전례 없는 무투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헌정회는 헌정사 60년을 이끌어 온 주역 1100여명이 오랜 의정경험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의 주요 현안과 헌정발전을 위해 정파를 떠나 우국충정의 목소리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국가원로단체다. 헌정회 운영위원회는 제헌부터 17대까지 각 대별 대표 2명씩 선임해 구성, 헌정회 운영 전반에 걸친 업무를 관장한다. 헌정회의 운영을 책임지게 된 김창환 의장은 “헌정회가 대한민국 정치발전, 궁극적으로 국운상승을 이끌어 국가원로단체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창환 의장의 각오를 들어봤다.

▲ 김창환 대한민국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

헌정회는 어떤 단체인가.
대한민국 헌정회는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과거 모든 정당과 정파를 초월, 국가 안보적 차원의 큰일에 대해 국가원로로서 비중 있는 충언으로 방향을 제시하며 중요한 국가정책 개발과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역대 국회의원을 지낸 모든 분들이 당연직 회원이 되며, 현역 국회의원은 명예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밖에 의원직을 거친 전직 대통령 네 분을 비롯해 여러 분의 총리, 장관 등 고위 공직자 출신이 많다. 제헌 국회의원은 생존자가 없고 2대부터 17대까지 1075명의 전직 의원들이 회원으로 있다.

의장에 선출된 소감은.
헌정회 운영위원회는 2대부터 17대까지 각 대별 대표 2명씩을 선발해 총 34명으로 위원회를 구성, 예산·결산을 비롯해 운영 전반을 심의하는 기구다. 헌정회 운영상 매우 중요한 요직인 만큼 지금까지 운영위원회 의장은 치열한 경합을 통해 선출해 왔다. 하지만 4월 10일 개최된 2009년도 제3차 운영위원회에서 전례 없는 무투표 만장일치를 통해 의장에 선출됐다.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하고 책임감도 무겁다. 분에 넘치는 영예를 안겨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하겠다.

사상 첫 ‘무투표 만장일치’ 운영위원회 의장 선출

운영위 운영방침은.
헌정회는 지난 3월 24일 전직 의원 629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제14차 정기총회에서 최초로 전원총회제 회장직선제가 치러짐으로써 변화와 발전에 큰 탄력을 받고 있다. 운영위도 이번 총회의 열정과 여세를 몰아 헌정회 당면 과제 및 현안해결에 적극 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한다. 운영위는 편견 없는 공정한 회의진행으로 위원들의 충분한 의사 개진과 원만한 의견 수렴, 민주적 합의 도출 등을 위해 힘쓸 것이다. 앞으로 운영위원회가 더욱 성숙된 새 모습으로 거듭나고, 차원 높은 토론문화를 꽃피워 모범이 되도록 위상을 격상시켜 나가겠다.

 

김창환 의장은…
 
경북 성주 출생
대구 계성중·고(42회) 졸업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6·8부정선거 무효화 투쟁위원회(성주·칠곡)위원장
신민당 성주·칠곡지구당 위원장
제8대 국회의원(성주·칠곡)
한국농촌개발연구소장
제9대 국회의원(구미·성주·칠곡·선산·군위)
국제의원연맹(IPU) 제61차 총회 한국대표
신민당 경북도당 위원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비서실 차장
대한민국 헌정회 이사
現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 감사
現 덕천서원 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
現 대한민국 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

정치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1968년 당시 신민당 경북 성주·칠곡지구당 위원장에 이어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 당선돼 국회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시작됐다.

하지만 한창 피 끓던 대학시절부터 애국과 반독재 투쟁에 대한 정치 일념이 싹트기 시작했으니, 학생신분에서부터 출발했다.

대학 재학 중 3·15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건국대 정치과 학우들과 함께 구국의 일념으로 민주당사에 찾아가 야당을 도왔고, 4·19학생의거에도 앞장섰다.

그 후 정치인으로 맹활약하기 시작해 당시 조재천 민주당 선전부장과 김대중 선전부 차장 밑에서 유세반으로 활약했다. 민주당 정권 탄생에 혼신의 정열을 바쳤다.

이 같은 인연으로 정계에 첫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고, 5·16군사혁명 이후에는 신민당 당적을 가져 야당 탄압의 대상인물로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야당인으로서 정치행보가 그 당시부터 계속됐다.

의성김씨 자부심으로 민주·개혁위해 온몸 던져

이른바 ‘3당야합’의 현장에 있었는데.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켜 ‘3당합당’(三黨合黨)을 이뤘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정권창출을 위해 야합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이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 민주당에서 분당할 때 나는 민주당을 지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야합을 했을 때도 이기택·노무현·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을 고수했다. 그 후 신민주연합과 민주당의 대통합이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집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선비정신에 입각해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정치의 둥지를 틀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당 총재까지 겸임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할 때는 대통령과 당 총재를 분리하자는 ‘역할분담론’을 주장하다가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나 비굴하게 소신을 굽힌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한결 같이 지역감정을 뛰어넘어 국민통합에 앞장섰으며, 자유와 민주, 개혁을 위해 선봉에서 여한 없이 싸웠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이 같은 정치행보는 고향 성주 출신의 항일독립투사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의 문중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자손이란 자부심이 크게 작용했다. 심산 선생의 대쪽같이 올곧은 기개를 흠모하며 정의를 지키기 위한 투사로 살아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1973년 국제의원연맹(IPU)에 참석한 한국대표단.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창환 의장, 정일영 박사, 김록영 전 국회부의장, 채문식 전 국회의장,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박준규 전 국회의장, 김윤하 전 의원.


‘덕천서원’ 복원 추진위원장 맡아 선비정신 전승

애향심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8대 및 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1971년 5월 25일 치러진 8대 국회의원 선거(성주·칠곡) 당시의 경쟁상대는 집권 공화당의 사무차장이자 2선의 송한철 의원이었다.

송한철 의원은 건국 후 수도청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거물 정치인 창랑(滄浪) 장택상 선생을 두 차례나 낙선시킨 막강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36세의 젊은 나이로 젊음과 패기, 민주화의 열정만 갖고 신민당 후보로 총선에 도전한 김창환 의장을 1만8000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지지했다.

또 1973년 2월 27일 9대 총선(구미·성주·칠곡·선산·군위)에서는 후일 ‘킹메이커’로 명망이 높았던 김윤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변화와 발전을 갈망하는 지역민들이 젊은 ‘김창환 의원’에게 그 열망을 투영시킨 것이다.

어찌 애향심을 갖지 않겠는가. 이후 현역 국회의원 시절부터 40여년 동안 비장한 결의와 투지를 바탕으로 부패에 휘말리지 않고 오직 가시밭길을 걸으며 개혁성, 전문성과 도덕성으로 지역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다.

8대 국회의원 당시 국정감사에서 온갖 유혹과 회유를 뿌리치고 산림조합연합회 부정선거지령문을 폭로해 회기 중에 주동인물의 사표를 받아냈던 일은 지금도 유명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는 고향 ‘덕천서원’(德泉書院) 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비정신과 유교문화의 계발 및 전승에 앞장서고 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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