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4] 일본인이 그린 이순신 “충성스럽고 용맹하기가 조선에서 가장 앞선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4] 일본인이 그린 이순신 “충성스럽고 용맹하기가 조선에서 가장 앞선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1.16 13:48
  • 호수 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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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군기물(軍記物)에 당당한 무장으로 묘사

일본 해군대학 교관 “조선의 안녕은 이순신 덕분”    

거북선, 용두 없고 쇠못 안 박은 평범한 배로 묘사

일본인이 상상해 그린 이순신. 그림 오른편 상단에 “이순신은 단기필마로 여진족 오랑캐를 물리치고,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전라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충성스럽고 용맹하기가 조선에게 가장 앞선다”는 설명을 달았다.
일본인이 상상해 그린 이순신. 그림 오른편 상단에 “이순신은 단기필마로 여진족 오랑캐를 물리치고,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전라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충성스럽고 용맹하기가 조선에게 가장 앞선다”는 설명을 달았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1545~1598년)을 당시 조선의 왕 선조(1552~1608년)는 어떻게 대우했나. 이 부분을 알면 망연자실할 뿐이다. 이순신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의 공격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의금부 감옥에 가둬 고문을 자행했다. 남은 12척으로 왜선 133척을 상대해 승리한 ‘명랑해전’에 대해서도 “큰 공이라 자랑할 일도 아니다“라고 평가절하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의 직첩이 내려졌으나 이는 적절하지가 않다. 조선 수군을 두 번이나 망가트린 원균에게도 같은 직첩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거나 후방에서 지원한 공로에 대한 공신록이다. 

이뿐이 아니다. 목숨 바쳐 싸운 장졸들 가운데 공신에 봉해진 사람은 겨우 18명이었다. 더 놀라운 건 관군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의병장이 많건만 단 한 사람도 공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을 합당하게 대우한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메이지시대(1868 ~1912년)의 해군 중장 출신으로 해군대학에서 일본 장교들을 가르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조선의 안녕은 이순신 덕분”이라고 한마디로 단정했다. 같은 시기 일본 해군 최고의 전략가로서 해군대학 교장을 지낸 사토 데쓰타로 역시 “넬슨이 세계적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알지만 넬슨은 인격이나 창의적 천재성에서 도저히 이순신을 필적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 시대의 일본 해군은 이순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이순신 관련 책을 해군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순신 전기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전기는 1908년 신채호가 쓴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이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당시 국민 단합의 필요성에 의해 쓰였다. 

그보다 16년이 앞선 1892년에 일본인 세키고세이란 사람이 ‘조선 이순신전’을 펴냈다. 이 책은 한반도 남해안 항구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임진전쟁 당시 일본 수군의 실패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순신을 일본 수군 전체와 맞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세키코세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구의 몸으로 지하에 누워 있게 된 것은 수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수군이 패한 수치는 다름 아닌 조선의 한 사내 이순신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이순신 현충사도 민초들의 힘으로 복구됐다. 1930년대 이순신의 묘소를 포함한 땅이 경매에 넘겨져 일본인에게 팔릴 뻔했다. 그때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조직돼 2만여명이 성금을 모아 빚을 모두 갚고 남은 돈으로 현충사를 중건했다.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는 수난을 이겨내고 민초들의 힘으로 복구된 것이다.

이순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화폐 속 이순신이나 현충사 영정은 책만 읽은 선비 같이 곱상하며 세종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고상안이란 사람은 이순신에 대해 “말솜씨와 지략은 난리를 평정할 만하나 얼굴이 풍만하거나 후덕하지 않고 입술이 뒤집혀 복 있는 장수는 아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 집안과 사돈 관계였던 윤휴는 “체구가 크고 용맹하며 붉은 수염을 지닌 담력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일본 에도시대(1615~1868년)에 상업출판이 성행하며 군기물(軍記物)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회본태합기’(1797~1802년), ‘회본조선군기’(1800년), ‘회본조선정벌기’(1854년) 등에 임진왜란 관련 삽화가 많다. 거기에 나타난 이순신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짙은 수염에 당당한 체구의 전형적인 무사의 모습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군기물인 ‘회본태합기’에 그려진 거북선. 용머리 대신 용 얼굴에 쇠못 하나 안 박힌 ㄷ자 형태의 지붕을 이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군기물인 ‘회본태합기’에 그려진 거북선. 용머리 대신 용 얼굴에 쇠못 하나 안 박힌 ㄷ자 형태의 지붕을 이고 있다.

이순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 1592년 2월 8일자에 처음 나타난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올리는 ‘당포파왜병장’ 장괘에 거북선을 만든 배경을 설명했다. 

“신은 일찍이 섬나라 오랑캐들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해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배의 앞머리에는 용머리를 설치했는데 입에서 대포를 쏠 수 있습니다. 등에는 쇠못을 꽂아 두었습니다. 배 안에서는 바깥을 잘 살펴볼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배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수백척의 적선 사이를 돌격해 들어가 포를 쏠 수 있는데 이번 출동 시에는 돌격장이 승선했습니다. 먼저 거북선에 명령을 내려 적선을 향해 돌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했습니다.”

‘회본조선군기’ 삽화에 그려진 거북선은 우리나라의 거북선과는 상당히 다르다. 배의 선수에 용머리 대신 커다란 용 얼굴이 그려져 있고, 쇠못 따위는 없는, ㄷ자형의 판판한 지붕이 배위를 덮고 있는 형태이다. 거북선의 성능과 외형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순신이 넬슨보다 창의적 천재성이 뛰어나다’는 일본인의 말 속에는 거북선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 같다(이 글의 일부 내용과 삽화는 ‘이순신, 옛 그림으로 읽다’(이상·가갸날)에서 가져온 것임).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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