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3] 우연히 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3] 우연히 봄
  •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승인 2023.05.02 09:12
  • 호수 8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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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봄

뜰 앞에 작은 풀이 바람결에 향기로워

설핏 든 잠에서 막 깨어 낮술에 취해 보네

그윽한 정원에 꽃 떨어지는 봄날은 길어

주렴 너머로 벌과 나비 늦도록 바삐 나네

庭前小草挾風薰 (정전소초협풍훈)

殘夢初醒午酒醺 (잔몽초성오주훈)

深院落花春晝永 (심원낙화춘주영)

隔簾蜂蝶晩紛紛 (격렴봉접만분분)

- 기대승(奇大升, 1549~1572), 『고봉집(高峯集)』


기대승(奇大升, 1549 ~1572)은 조선 중기의 관료로 32세인 155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봉교, 승지, 병조좌랑 성균관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는 관료로서의 이력보다는 학문적 성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퇴계 이황과 서신을 통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해 주고받은 논쟁은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 시는 어려운 글자나 고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생각이나 회포를 직접적으로 서술한 부분도 없다. 어느 봄날 술을 한잔 먹고 봄의 정취를 즐기는 시인의 모습과 시인이 본 봄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였다. 공교로운 묘사를 가하지 않아도 시의 상황이 자연스레 그려지며 여유롭고 한적한 봄날의 정취와 봄의 생동을 느껴볼 수 있다. 나아가 봄의 자그마한 생동을 포착하고 이를 완상하는 시인의 소박한 성품 역시 엿볼 수 있다.

시의 제목은 ‘우제(偶題)’이다. 풀이하자면 ‘우연히 짓다’ 정도가 되겠다. 한시 중에는 ‘우제’ 또는 ‘우작(偶作)’과 같이 ‘우연히[偶]’가 붙은 제목이 많다. 이들은 당나라 두보의 작품에도 보일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우연’이 들어간 제목이 붙게 되었을까. 시인이 시를 지을 당시 직접 붙였을 수도 있고, 후대에 시고(詩稿)를 정리한 이가 임의로 붙였을 수도 있다. (중략)

‘우제’라는 제목에 천착해 보면, 위 시를 지은 순간은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기대승에게는 시적 감수성을 일으켜 작시가 이루어질 만큼 특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당시 어떠한 상황이었을까. 시를 지은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시가 수록된 그의 문집인 『고봉집』이 시기 순으로 작품이 편찬되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37살인 1563년 이후 멀지 않은 시간에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기대승은 승정원주서, 홍문관수찬, 병조좌랑을 지내는 등 바쁜 관직에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맞이한 어느 봄날의 소박한 정취는 우연히 시작(詩作)으로 이어질 만큼 그에게 감흥과 즐거움을 주었던 모양이다.

항상 돌아오는 봄이지만 요즘에는 봄이 부쩍 짧아진 느낌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봄인데도 삶이 바빠서 그마저 제때 돌아보지 못하곤 한다. 지금도 봄이 곁에 와 있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화려한 봄놀이도 좋거니와 기대승처럼 조용히 봄의 생동을 완상하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어 보인다. 어떤 형태든 우연하게라도 그 봄을 즐기며 남은 봄을 전송해 보아야겠다.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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