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7] 다시 보는 중일전쟁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자”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7] 다시 보는 중일전쟁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6.19 13:18
  • 호수 87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군이 난징의 주민을 일본도로 처형하고 있다.
일본군이 난징의 주민을 일본도로 처형하고 있다.

1937년 7월 일본이 대륙침략 목적으로 사건 조작, 전쟁 일으켜   

난징대학살·731마루타부대·3500만명 희생…가장 참혹한 전쟁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전쟁의 목적이 어느 한 민족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中日戰爭·1937~1945년)을 말한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는 야만적인 군사행동을 저질렀다. 삼광은 살광(殺光) 모조리 죽이고, 소광(燒光) 모조리 태우고, 창광(搶光) 모조리 빼앗자는 뜻이다. 

중일전쟁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됐다. ▷난징대학살 ▷741마루타부대 ▷2000만~3500만명(중국인만) 희생이 모두 이 전쟁으로 야기된 불행한 일들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솜 강 유역에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처절한 참호전도 이 전쟁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참호전은 최근 ‘서부전선 이상 없다’란 영화로 제작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일전쟁의 불씨는 작은 돌다리에서 피어올랐다. 1937년 7월 일본과 중국은 베이징(북경)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루거우차오’에서 대치했다. 한밤중에 어디에선가 총성이 들렸다. 놀란 일본군이 점호를 해본 결과 인원 한 명이 비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인원은 소변을 보러간 것이었고 바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부대를 이끌던 일본장교 무타구치 레냐는 중국군이 경계선을 넘어와 부대원 한 명을 살해했다고 단정 짓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소규모 무력충돌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고, 이로 인해 양측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중일전쟁의 발화점이 됐다.  

◇폭격 실수로 민간인 1000여명 희생

일본은 베이징과 텐진을 공격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불과 이틀 사이에 두 도시를 함락했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아시아 최강이었다. 일본은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만주통치권을 가지려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해 대륙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모택동의 공산당이 한편에 버티고 있어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공산당은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당에 비해 힘이 약했다. 중일전쟁 초기에는 국민당만이 일본을 상대했다.  

중국군이 당황하는 사이에 일본군은 상하이로 진격했다. 상하이는 산업시설이 밀집돼 있고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가능했던 도시였다. 장제스는 50만명의 최정예부대를 투입해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군 폭격기가 일본의 이즈모함을 폭격하러 가던 중 실수로 포탄을 떨어트렸고 그로 인해 상하이 민간인 100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일명 ‘검은 토요일’)가 발생했다. 중국군이 그 정도로 엉성했다는 얘기다. 중국군은 죽기 살기로 싸웠으나 결국에 상하이는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만다.   

일본군은 이어 12월 13일 장제스의 국민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다. 그리고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질렀다. 약 6주 동안 20~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됐다.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도 2~8만 명에 이른다.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로 난징시 건축물 23.8%가 불에 타고, 88.5%가 파괴됐다. 이 밖에 일본군은 항저우·쑤저우 등 주요도시에서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해 적어도 3만 명 이상이 살해됐고, 수많은 강간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중일전쟁의 절정은 731마루타부대의 소행이다. 일본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부근에 731부대를 만들어 세균전에 대비한 생체실험을 했다. 페스트균, 콜레라균을 산 사람에 주사, 세균실험을 했고, 사람들을 줄 세워놓고 새로 개발한 총을 쏘아 몇명이 죽나 보았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해부를 하기도 했다.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포로들이 여기에 이용됐다. 이 실험용 인간을 ‘마루타’라 불렀고, 여기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

◇일본의 잔학성·침략 근성 경계해야

1945년 패망까지 ‘마루타’ 3000여명이 죽었고, 부대 인근지역 주민 20만명이 세균감염으로 질병을 앓았다. 패전하자 일본군은 ‘생존 마루타’ 400여명을 독살하고 실험 시설물을 파괴했다. 당시 이 부대에 소속됐던 일부 양심 있는 군인들의 증언으로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최근까지도 생화학탄 수십 발이 발견되기도 했다.

일본군은 광둥에서 산시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했다. 장제스의 군대는 공산당과 내전을 중단하고 함께 일본의 공격을 막아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중국군의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화됐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따라 일본군은 광범위한 전선에서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 데 불과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태평양을 넘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 등을 상대로 힘든 전쟁을 치르다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투항했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선언 수락과 더불어 중국에도 항복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이겼던 일본의 뇌리 속에는 이 시간에도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국가로서 동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야욕과 충동의 인자가 내재돼 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일본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사찰단에게 자기들이 내놓는 시료에 한해서만 사찰하라는 식의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잔인함과 악랄한 침략 근성을 중일전쟁을 통해 새롭게 배워 후손에게 알려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