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 “정직 하나만으로 버텨온 ‘영화 인생’… 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한국 영화 85편, 외화 수입 160여편… 1세대 영화사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으로 추대 받아… 대한노인회 ‘이우석 공로상’ 제정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영화관에서 ‘배급 동아수출공사’란 자막을 본 기억이 날 것이다. 지금부터 감상할 영화를 이 회사가 수입했거나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이다. 특히 1960 ~80년대 외화 대부분이 이 회사를 통해 수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사를 설립한 이가 바로 이우석(90) 동아수출공사 회장이자, 대한노인회 고문이다. 

이우석 회장은 “‘만추’·‘깊고 푸른 밤’·‘바람 불어 좋은 날’ 등 한국 영화 85편을 제작하고, ‘다이하드’·‘007 죽느냐 사느냐’ 등 외화 160여편을 수입한 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라며 “영화 85편이라면 빌딩 85개를 지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1세대 영화사 20여 곳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회사는 동아수출공사가 유일하다.

이 회장은 또 대한노인회가 해마다 노인복지 향상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소암 이우석 공로상’을 제정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참고로 2025년 소암 이우석 공로상은 신기영 대전 유성구지회장과 김순철 인천 중구지회 사무국장에게 수여됐다. 

이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성장 과정은 남의 집 머슴살이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신산했다. 18세 때 친구 아버지의 무역회사에 취직해 외국영화 수입하는 일을 배웠다. 1967년 동아수출공사란 영화회사를 차려 평생을 외화 수입과 영화 제작에 바쳤다. 

국민훈장 보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제16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국무총리 표창, 제43회 영평상 공로영화인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 이 회장은 (사)국가원로회의(상임의장 오명) 공동의장에 추대됐다. 지난 6월 말,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이 회장을 만나 영화에 쏟은 열정과 근황을 들었다.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됐다.

“국가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 동참하게 돼 감사히 생각한다. 노인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돕겠다.”

-정부가 국민에게 현금 주는 걸 어떻게 보나.

“내가 벌어서 내가 먹어야지 공짜로 주는 돈을 받는 건 좋지 않다. 액수가 큰 것도 아니고 받았다는 소리만 듣지 않나. 더구나 자기 돈도 아니고 그게 다 국민 세금인데.”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세 살 때 징용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열 살 때까지 살았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항복하면 봐준다고 했지만 승복할 이유가 없어 버텼다. 그때 맞아서 코뼈가 비뚤어졌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한다. 다만 장애 복지카드가 일생 도움이 되기도 했다(웃음).”

-수입 외화 중 기억에 남는 영화는.

“나를 살려준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늑대와 춤을’이란 미국 영화였다. 아카데미 감독상 등을 받아 화제가 돼 (수입사 간) 영화를 들여오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보통 외화 한 편에 1만~2만 불을 주었는데 이 영화는 8만 불을 줬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대만의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은 시청률이 30%를 넘었다고.

“우리 국민을 얼마나 즐겁게 해준 드라마인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대로만 집행한다면 성공하는 대통령이 된다고 대통령 측근에게 말하기도 했다.”

한 행사장에서 이우석 회장(중앙)과 영화배우 신영균(왼쪽 끝).
한 행사장에서 이우석 회장(중앙)과 영화배우 신영균(왼쪽 끝).

이 회장은 외화를 들여오려면 제작도 해야한다는 수입쿼터제 시행 이후 영화제작에도 손을 댔다.

-의미가 남다른 영화라면.

“최인호 원작에 안성기·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1985년)이다. 해외 촬영은 엄두도 못 냈고 당국에서 허가도 쉽게 안 내줄 때였다. 그래도 한국 영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여 미국에서 촬영했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한국 영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을 휩쓸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첫째 시나리오가 중요하다. 무조건 좋은 작가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소설가 최인호(1945~2013년)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와 만든 영화 ‘별들의 고향’ 등이 히트를 쳤다.”

-최인호는 일찍 세상을 떠 안타깝다.

“그렇다. 글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하루는 영화를 찍겠다고 찾아왔다. ‘작가가 무슨 감독이냐’ 했더니 ‘자신 있다’기에 맡겨 봤다. ‘걷지 말고 뛰어라’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폭삭 망했다. ‘아이고. 회장님 미안합니다’ 하더라.”

-유능한 감독이라면.

“배창호 감독. 나는 제작자로 돈만 댔지 연출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 와야만 성공한다는 말이 돌아 조감독들이 우리 회사에서 연출하려고 줄을 섰다.”

-가깝게 지낸 스타들은.

“강수연과 안성기는 연기력도 뛰어나고 인성과 친화력까지 갖춘 배우였다. 신영균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지금도 골프 치며 가깝게 지내고, 여장부 스타일의 김지미는 담배는 피웠으나 술은 입에 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

“서울 강남 동아극장과 장충극장, 빌딩과 서울 우면동의 큰 저택(5000㎡)을 소유했으나 영화 제작비 대려고 다 매각했고 지금은 아파트 한 채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했다는 표시를 남기기 위해 인천 항동의 1700평 대지에 3개의 촬영소(넥스트스튜디오)를 지어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이 회장은 번 만큼 기부도 많이 했다. 해마다 영화인을 위해 성금을 내놓는 것을 비롯해 문공부 퇴직자들 모임인 ‘문화회’에 3억원, 대한노인회에 2억원, 고향 성주에 2억원의 장학금을 각각 내놓았다. 

-무엇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나.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지만 영화계에 내 이름 석 자를 꼭 남기겠다고 결심하고 정직 하나만으로 버텼다. 1969년 미·영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공군대전략’이란 영화를 수입했지만 우리나라에선 참패했다. 입장료 선수금도 해결하지 못해 다음 상영지인 부산에 필름을 보내지 못할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저를 잘 아는 피카디리 사장이 ‘이 회장은 절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필름을 내줘 급한 불을 껐고, 신용과 정직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한국영화 반세기의 증인’이기도 한 이우석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우리 영화가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는 사실이 기쁘다”며 “다시 태어나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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