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소장품‧영상‧풍경 보며 과거로, 작가들의 글‧책 통해 미래로 여행
1920년대 대합실 내 맥주바 재현, 현 역사와 연결된 통로 최초로 개방
[백세시대 = 배성호 기자] 지난 1900년 경인선의 서울 도심 구간 개통과 함께 서울 중구 봉래동2가 122번지 일대에 ‘남대문 정거장’(남대문역)이 문을 연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서 묘사하기도 했던 남대문 정거장은 1925년 9월 30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새롭게 지으면서 ‘경성역’으로 변경된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서울역’으로 명찰을 다시 바꿨고, 2004년 고속철도(KTX)가 개통하면서 현 서울역사에 철도역 기능을 내줬다. 현재는 옛 서울역사에 부여된 사적번호 ‘284’에서 착안,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변신해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옛 서울역사의 준공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1월 30일까지 특별기획전 ‘백년과 하루: 기억에서 상상으로’에서는 3가지 테마로 구성해 옛 서울역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본다.
르네상스 양식에 기반한 옛 서울역사는 붉은 벽돌과 석재가 어우러져 1920년대 서양 건축 양식을 느낄 수 있다.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했으며, 중앙 돔형 지붕과 양쪽 대칭 구조는 그 당시 서구 건축의 영향을 그대로 간직해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중앙홀은 상부의 돔을 지지하고 있는 12개의 화강암 기둥과 동·서쪽의 반원형 창, 중심부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근대식 건축물의 인상적인 요소들을 모두 보여준다. 전시에서는 이러한 중앙홀에 LED패널, 도면 등을 활용해 옛 서울역사의 100년을 담은 권민호의 ‘서울역, 백년의 얼굴’을 설치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온 역사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공간인 ‘엮어내는 기억’에서는 옛 서울역사가 간직한 백년의 흔적을 돌아본다. 역사를 상징하는 사진과 소장품, 당시의 풍경을 담은 영상을 한자리에 모았다.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기록 카드, 1980년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자료 등 굵직한 사건의 흔적도 포함됐다.
또 전혜주·이완·이수경·박경근·김수자·김병호·신미경 작가 등은 각각 옛 서울역사를 상징하는 단어인 확산·기준·경계·저항·이동·구축·전환을 주제로 한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대표적으로 이완의 ‘고유시’는 주요 사건이 담긴 신문을 배경으로 제작된 수십개의 시계로 만든 탑을 통해 근대적 시간의 개념을 일깨워준 서울역사의 의미를 강조한다.
옛 서울역사는 진일보한 생활과 문화, 심미와 감성 등을 앞서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양식당 ‘그릴’을 운영했고, 대합실에서는 여행객들을 위해 신식 맥주를 판매하기도 했다.
두 번째 공간인 ‘이어지는 기억’에서는 옛 서울역사가 남긴 생활문화와 정서를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린다. 1930년대 1·2등 대합실은 승객들이 오가던 공간이자 맥주와 차를 판매하던 ‘맥주바’의 풍경을 재현해 당시 서울역에서 팔던 맥주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시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 철도의 개통과 함께 들어온 수입 원단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션 풍경도 오늘날 브랜드와 협업해 되살렸다.
또한 옛 서울역사의 마지막 역장 배종규 씨의 인터뷰와 서울역을 거쳐 간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조선 최초 유럽 여행객 나혜석,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도 모두 서울역을 거쳤다.
마지막 ‘읽어내는 상상’은 미래 서울역을 상상한 작가의 글과 서점이 큐레이션 한 서적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확장되는 서가로 꾸며졌다. 이중 눈여겨볼 것은 ‘조선말 큰사전’ 원본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집필하다 강제 중단된 뒤, 광복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처럼 발견된 원고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모티브가 된 자료이자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노력의 상징이다. 낡은 종이에 남은 필체와 교정 흔적에서는 언어를 되살리려는 간절함이 전해진다.
또 국동완, 박솔뫼, 안희연, 윤혜정, 정성갑, 최유수 작가 등이 ‘서울역의 미래’를 상상해 쓴 글도 전시된다. 역사적 건축물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 기간에는 그동안 외부에 개방하지 않았던 옛 서울역과 고속철도(KTX) 서울역사 간 연결 통로도 처음으로 열렸다. 서울역 이용객은 연결 통로를 거쳐 역사 내에서 문화역서울284로 들어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연결 통로로 서울역으로 이동해 열차를 탈 수도 있다. 당국은 전시 기간 중 연결 통로 이용 현황을 분석한 후 내년부터는 구-신 서울역사 간 연결 통로 상시 개방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차 푸드카트 콘셉트의 이동형 이벤트도 눈길을 끈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 정해진 시간마다 역무원이 카트를 끌며 등장한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부터 12시 30분까지 과거 철도 승무원의 복장을 한 도슨트가 문화역서울284에서 출발해 옥상정원, 중앙보행광장 등을 잇는 루트를 따라 관람객을 안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