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70대 초반의 지인은 5년째 간경화를 앓고 있다. 그는 기자에게 “겉으로는 멀쩡하나 간이 점점 굳어져 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라며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숨이 멈출 즈음에는 복수가 차고 피를 토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뜬금없이 아내와 죽음을 얘기한 적이 있다. 아내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자기가 뜻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고통을 당하는 말기 암 환자가 자기 뜻대로 죽을 수 없는지, 그것을 왜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지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병들어 누우면 자식들한테 피해가 간다”며 “그때는 스위스로 가서 조력 자살을 할 것”이라고도 했다.
요즘 조력 자살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누구나 참기 힘든 고통과 좌절, 심리적 무기력과 압박감을 받을 때 먼저 떠올리는 건 죽음으로써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대니얼 카너먼은 지난해 90세에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병세는 심한 편이 아니었다. 신장 기능이 떨어졌지만 투석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상을 떠난 그 주에도 논문 작성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앞당겼다.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의 비참과 굴욕은 불필요하다는 신념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카너먼은 죽음에 초연했다고 한다. 팟 캐스터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2024년 3월 19일에 받고는 3월 27일에 죽을 계획이기 때문에 요청한 5월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SF 작가 남유하씨는 말기 암으로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스위스행 동행기를 책으로 펴냈다. 1944년생인 남씨의 어머니는 2009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2019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2020년 가을 뼈 전이, 이듬해 2차 뼈 전이 선고를 받았다. 더욱이 2022년 여름 네 번째 척수 수술까지 받았다. 원래는 2023년 10월 말을 조력 자살 날짜로 잡았지만, 두 차례 앞당긴 끝에 8월 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통증이 심해져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씨의 책 제목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건 생전의 남씨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씨는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으면 고통을 더 받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따르기는 했지만 딸로서 마음이 굉장히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존엄사 반대론자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강조하는데 의학의 발달로 완치가 불가능한 데도 연명치료를 하는 상황이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했다.
생애 마지막에 의미 없는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약한 사람이 최근에 300만 명을 넘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성인 102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조력 존엄사(조력 사망) 합법화에 82%가 찬성했다. 대한의학회지 최신호 논문에서 마지막 순간에 35.5%가 안락사, 15.4%가 의사 조력 자살을 택하겠다고 답변했다. 모두 존엄한 죽음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데이터이다.
연명 의료 중단은 소극적 안락사(존엄사)이다. 안락사는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여하는 것을 말하고, 의사 조력 자살은 처방받은 약을 환자가 스스로 복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언어상의 분류일 뿐 결국은 자기 손으로 자기 생명을 끊겠다는 마지막 선택이다.
우리의 현실 때문에 조력 사망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가졌던 전문가들도 상당수 도입 논의 찬성으로 돌아서고 있다. 죽을 권리를 법제화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아내, 지인이 말기 암 등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저 언제 끝날지 모를 고통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분명한 해법이 나올 것이다.
조력 자살은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