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손맛 좀 볼래?
할아버지 손맛 좀 볼래?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5.22 11:27
  • 호수 4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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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남자’ 바람 타고 남성 어르신 요리교실 인기

“취나물밥 만들어 줄테니까, 이따 꼭 먹고 가요.”
지난 5월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에서 만난 이영일(78) 어르신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어르신은 60여 년간 내조에 힘쓴 아내에게 몰래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 이날 개강한 남성 어르신 대상 요리교실인 ‘뚝딱 완성 한끼 식사 만들기’ 수업을 신청했다고 했다. 요리 경험은 전무했지만 의욕만큼은 전문 요리사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 최근 혼자 살거나 혼자 살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남성 어르신이 늘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19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남성 어르신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

아내 위한 ‘깜짝쇼’ 준비… 혼자 살 때 위한 대비도
전문가 “성취감과 자존심 높일 수 있어” 요리 활동 권장

최근 tvn ‘집밥 백선생’,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등 남자 연예인과 요리사를 내세운 요리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는 등 요리하는 남자들이 각광받고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지자체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남성 어르신 요리교실이 인기를 끄는 등 ‘요리하는 할아버지’가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서울 영등포구(남성 요리 교실), 마포구(웰빙 요리교실), 경기 의왕‧안양‧군포시 등 6개 기관(청춘밥상), 광주시여성단체협의회(꽃할배! 건강한 식생활 교실), 대구 중구(남성 어르신 요리교실) 등 전국에서 남성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요리교실이 인기리에 운영 중이다. 또 서울 마포구에서는 2012년부터 매년 노인의 날에 맞춰 ‘삼식이 요리대회’라는 남성 어르신 요리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화요반과 목요반으로 나눠 남성 어르신 요리교실을 운영 중인데 대기인원이 있을 정도로 참여율이 높다. 이날 화요반 12명의 어르신들은 취나물밥과 양념장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앞치마를 생전 처음 입어보는 어르신들 몇 명은 사회복지사와 요리 강사의 도움으로 겨우 착용할 수 있었다.
오정균(82) 어르신은 “앞치마도 어색하고 칼질도 서툴지만 당뇨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해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날이라 그런지 어르신들 대부분은 긴장한 듯 실수를 연발했다. 양념장에 넣을 파만 채를 썰어야 했지만 한 어르신이 듬성듬성 썰어야 할 취나물까지 채를 썰면서 교실 안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어르신들이 요리를 하는 이유는 혼자 살거나 혼자될 것을 대비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창훈(71) 어르신은 “혹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대비해 요리를 배우러 왔다”면서 “시대가 바뀌어 남자 혼자서도 한끼 정도는 거뜬히 차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충남 논산자원봉사센터에서 진행하는 ‘꽃할배 요리사’ 프로그램은 ‘친구 만들기’ 요소를 더해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어르신들이 요리를 배우면서 친구까지 사귐으로써 외로움을 달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친해진 어르신들은 관내 어린이집 아이들을 초청해 직접 만든 음식을 선보이는 뜻 깊은 활동도 하고 있다.
특히 양평군 보건소가 운영하는 ‘요리하는 청춘’ 프로그램은 참여 어르신 20여명이 참여 전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크게 낮아져 요리가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5월 13일 종강한 ‘요리하는 청춘’은 남성 어르신을 대상으로 10주간 20여 가지의 조리실습, 저염‧저지방 영양교육, 사전 사후 건강측정(혈압, 혈당, 빈혈, 스트레스, 우울증검사 등)을 진행했다. 일부 어르신의 경우 수업 참여를 위해 여행일정까지 변경했고 89세의 최고령 어르신은 몸이 불편함에도 10주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는 등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이런 열의 때문에 평균 55점(100점이 가장 심각)이었던 스트레스 지수가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47점으로 낮아져 건강도 챙길 수 있게 됐다.
전문가들은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정서적 안정도 꾀할 수 있는 요리의 장점 때문에 남성 어르신들의 요리 활동을 권장하고 있다.
한국요리심리치료협회 권명숙 회장은 “남성 어르신의 경우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를 통한 정서적 안정도 찾을 수 있어 요리를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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