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흰쌀밥
[독자기고] 흰쌀밥
  • 관리자
  • 승인 2010.11.19 15:58
  • 호수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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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석 대한노인회 경북상주시 외남면 분회장

가을 들녘에 황금빛 물결을 수놓는 벼이삭들을 보면 그 풍경만으로도 극치의 장관을 이룬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또한 풍요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농민들의 마음은 결코 기쁘지만은 않다. 쌀 소비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창고에는 남은 쌀이 해마다 쌓여만 가니 그 마음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 농촌에 남아있는 이들이 대부분 어르신들이지만 한때 농업의 전성기가 있었다. 바로 해방과 5·16 혁명 이후다. 당시 농업기술센터의 연구와 지도육성으로 다수확 벼 품종인 ‘통일벼’가 보급됐다. 이는 농민들에게 희망과 소득을 높여줬고, 영농의 의욕을 북돋아 줬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에 남은 것은 아픈 허리를 두들기는 힘없는 늙은이들의 한탄 섞인 긴 한숨 뿐이다.
쌀은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식재료이며 특히 우리나라의 주식이다. 세종대왕 때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기름지고 많이 생산되는 지역은 경상도의 상주, 안동과 진주, 남원, 구례 지방이었다. 낙동강과 영산강의 유역으로서 기름진 옥토와 수리가 잘되고 기후가 좋아서 벼 생산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볍씨 한말을 논에 뿌리면 벼가 80~140말까지 생산됐다고 전해졌을 정도다.
필자도 어릴적부터 논농사를 거들며 아련한 추억들을 갖고 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봄의 늦서리가 온 다음 못자리 논에서 모를 키워, 6월 중순 하지 전후에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가 끝나고 활착이 되면 큰 호미로 첫 논매기를 한다. 이후 맨손으로 두벌 논매기를 해 논의 잡초를 제거했다. 가을 추수도 수작업으로 타작해야만 알곡의 벼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영농에 지친 몸과 덥고 힘든 일을 잊으려고 농주인 막걸리를 마시고 흥을 돋워가면서 농사일을 했다. 넓은 들에서는 농요(農謠)와 사물놀이 소리가 끝이질 않았다.
두 번 논매기가 끝나면 일꾼들은 주인을 소에 태우고 큰길에서 ‘쾌지나 칭칭나네’ 노래를 합창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흥겨운 놀이로 끝맺음을 했었다. 이렇게 힘들게 수확한 쌀은 소중한 양식이었다.
지금이야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일부러 지어먹지만 그 당시 흰쌀밥은 정말 귀한 음식이었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못했고 큰 잔치날이나 돼야 구경할 수 있었다. 불과 40여 년 전 일이다. 지난날 우리네 어머니들은 쉰밥도 물에 씻어서 다시 삶아서 먹거나 의복의 풀로 활용했다. 밥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여기고 살았다.
지난날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의 시절을 우리들은 까맣게 잊고,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대자연에 죄스럽기도 하다. 농민들의 피와 땀이 서린 결과물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소비하고 또 낭비하고 있다.
이 풍요로운 세상에 무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쌀이 없어서 하루 세끼의 밥을 못 먹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공업이 발달되고 문화가 향상되며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도, 인간은 먹고, 자고, 배설을 해야만 살아 갈수 있는 몸이 아닌가.
우리의 주식인 쌀 소비를 늘리고 쇠태(衰態)해 가는 농촌경제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살리는 방도는 없을까? 이제는 강 건너 불구경으로만 보지 말고 도시와 농촌 간에 상생(相生)의 길을 찾는데 다함께 고민을 하고 현명한 지혜를 모아야만 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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