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의 만남 (1)] 이상희 前 건교부·내무부 장관 ②
[명사와의 만남 (1)] 이상희 前 건교부·내무부 장관 ②
  • 관리자
  • 승인 2007.01.2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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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장관 간담회서 평양 가는 ‘자유로’ 건설 설득

밤 늦은 시간,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 전화를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옛날로 치면 3정승 아래 판서가 되는 것이니 가문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슴 뛰는 일일 것이다. 이상희 전 장관은 그런 전화를 세번 받았다. 내무부 장관으로 두번, 건설부(현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한번 장관이 되어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건설부장관으로 나갔으면 하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이 장관은 “(장관으로)왜 갑니까. 안 갈랍니다”라며 사양하고 “각하를 위해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한테 이렇게 막말 하듯이 거절해도 괜찮은 것인가?


“대통령 선거를 치렀으니 할 수 있지요. 정말로 장관으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추진하고 있던 신도시건설 사업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얘기다. 이 장관은 “고마워 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니 이상했던가 봐요. 대통령이 ‘왜?’하고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에요”라고 당시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 장관이 일산 신도시를 비롯해서 정말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면서 앞으로의 소임을 구체적으로 밝혔지만 노태우 대통령도 물러서지 않았다. 건설부 장관으로 가서 국토건설 사업을 총괄 지휘하고 지시 감독한다면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직접 챙기는 것과 장관으로 한 다리 건너 지시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끝끝내 “알겠습니다”소리를 안했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도 결국 손을 드는 척했다. “만일에 다른 적당한 사람 있으면 안 가고, 전화 없으면 가야하니 그리 아소!”하고 전화를 끊더라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결정한 일이 가벼이 번복될 리 없는 일. 다음날 여섯시에 사령장을 받으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 장관은 “사령장을 받으러 청와대에 갔더니 서동권 안기부장이 타박을 하더군요”라고 했다. 밤늦게까지 조각을 했지만 건설부장관을 정하지 못하고 고심하다 이상희 장관을 찾아내고 ‘어째 그 생각을 못 했을까’하며 ‘이제 자도 되겠다’고 대통령이 좋아했는데, 그가 딱 거절해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건설부 장관으로 나가면서 이 장관은 일산 신도시 꿈을 접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신도시 건설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토지공사 사장으로 재임한 짧은 기간 동안 그가 펼친 국토건설의 꿈은 우리 시대의 기념비적인 사업으로 평가될 만하다.

 

주택난 해소를 위해 내놓는 가장 유력한 해법으로 흔히 신도시 건설 방안을 내놓고 있는데, 이상희 장관의 신도시건설 당시의 의욕과 아이디어를 살펴보자.


서울에서 판문점으로 가는 자유로는 경기 북서부권의 대동맥과 같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국무회의에서 번번이 사업계획안이 부결됐다. “처음에 누구도 자유로 같은 개념을 갖지 못했어요. 오직 제방을 막으라는 과제였지요. 영구히 터지지 않는 제방을 만들라, 하는 것이 임무였어요.”

 

이 장관은 말한다. “당시는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물이 범람해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제방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이에 이 장관은 상폭 50m 하폭 100m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제방건설 계획을 세웠다. 그 지역에서 사단장을 역임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지프(SUV)를 타고 순찰을 다닐 때 땅이 질어 사병들이 고생하던 얘기를 하며 지프를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하나 낼 수 없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통일을 대비해 왕복 10차선 이상의 큰 고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이고 당시 국무위원들도 모두 놀랐다. 배후에 대도시나 산업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큰 고속도로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업계획안은 국무회의에서 번번이 부결됐다. 건설비용만도 수천억이 소요된다는 것이 부결 이유.

 

하지만 이 장관은 국가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자유로 건설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경제관련 장관들만이 따로 모여 간담회를 갖기까지 했다. 이 장관은 간담회에서 “대체 왜 반대합니까? 이게 장차 평양 가는 고속도로가 됩니다. 지금 만들어야 돈이 적게 들어요”라며 설득을 했다. 일산 신도시가 건설되고 일대가 개발되면 땅값이 크게 올라 천문학적인 건설비를 들여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될 것이 뻔했다.

 

이 장관은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다고도 했어요”라며 “군에서 협조를 받으면 그렇게 큰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었지요. 세금 예산 안 달라고 할 테니 의결해 달라고 했어요”라고 설득하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왕복 10차선 도로를 북쪽으로 낸다는 발상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노재봉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동조하면서 자유로 건설의 큰 물고가 트이게 됐다. 결국 국무회의에서 의결이 되었고, 이 장관의 아이디어 그대로 3개 공병여단에 76억여원 어치의 최신형 중장비를 제공하고 군인들을 동원해 자유로 건설에 들어갔던 것.

 

군인들이 공사를 하자 아침과 저녁의 지도가 달라졌고 지금과 같은 고속도로가 되었다. 자유로의 경제적인 효용성은 물론이고 북한 당국에 제시할 수 있는 우리의 통일 의지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유력한 시설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통일 동산 건설도 살펴볼 만하다. 국방부 최고위층에서는 지금보다 더 후방에 통일동산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장관은 가능하면 철책선 가까이 통일동산 시설을 가져가려고 했다. 실랑이 끝에 의견조정을 한 것이 지금과 같이 일부 시설은 철책 부근까지 가고, 일부는 감추어졌다.

 

군 당국이 철책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한 이유는 북한의 소총사격으로도 우리 시민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모한 도발을 하지 못할뿐더러 남쪽 체제와 경제발전을 보고 북한이 변화될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이런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일산은 특히 레만호수를 모델로 한 호수공원을 조성하는 등 ‘여기가 지상의 낙원이구나’ ‘천당이 있다면 이런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게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사업에 착수했다.

 

장관직을 마다하고 그 꿈을 실현시켜보고 싶었다고 한다. 스위스에 갔다가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과 같은 이미지의 한 도시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정통 내무부 관료생활로 잔뼈가 굵은 이 장관이 도시건설, 도시개발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진주시를 현대적으로 탈바꿈 시켰던 1968년 진주시장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요즘은 어떤가. 물론 아직 국토건설, 도시공원 건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요즘도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저녁식사 후 홍익대 앞까지 산책을 겸하여 걸어가 미술관련 고서점가를 순례하며 관련분야 책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자료를 구입해온다.

 

그렇게 장만한 책과 관련 자료들로 지하 서재가 빼곡 들어차 있다. 조경, 미술, 도시건설 관련 국내외 전문 도서들로만 어림잡아 3만여권은 될까.

 

이 장관은 “저녁 산책 시간은 아주 특별합니다”라며 “산책을 나가면 25% 정도의 확률로 이헌재 전 부총리를 만납니다”라고 했다. 이 장관의 산책로는 한번은 홍대 앞쪽으로 또 한번은 성산동 뒷산으로 산책을 나가고, 이헌재 전 부총리는 한번은 동교동 방면으로 또 한번은 홍대 앞으로 산책을 나오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조우하게 되면 차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돌아온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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